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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상식 4]신청 자격 및 절차 - "이젠 미국을 위해…" 매년 60만~80만명 '충성서약'

미국에서 합법적 이민자로 살아가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영주권을 받는 것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둘 다 취득 절차가 까다롭긴 하지만 시민권 취득은 국적이 바뀐다는 점에서 훨씬 더 엄중하다. 시민권을 취득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미국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시민권 없이 영주권만 있어도 미국 생활에 큰 불편은 없다. 하지만 점점 보수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추방이나 권익 제한 등으로부터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고 마음 편히 살기 위해 시민권을 취득해야겠다는 사람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시민권을 받으면 해외여행이나 외국 거주 기간에 일체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되는데 이는 영주권자가 누릴 수 없는 혜택이다. 또 주요 공직에 나서거나 각종 선거에서 마음껏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도 시민권자만의 특권이다. #선서식장의 충성서약 매년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미 전역에선 시민권 선서식이 열린다. 캘리포니아나 뉴욕같이 시민권 신청자가 많은 지역에선 이 때 말고도 연중 몇 번씩 열리기도 한다. 선서식이 열리면 각 행사장마다 새로 시민권을 받는 사람이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른다. 출신 국가도 수십 개국이다. 최근 10년간 통계를 보면 해마다 60만~80만 명의 외국 국적자가 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있다. 그중엔 한국 사람도 2~3% 정도가 매년 시민권을 받아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있다(그래프 참조). 시민권 선서식의 하일라이트는 '충성서약(Oath of Allegiance)'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는 지금까지 속했던 국가와 단절하고 이 순간부터 미합중국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며 미국 시민으로서 법이 정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오직 미국에만 충성할 것을 서약합니다." 이어 '미국 국기에 대한 맹세(Pledge of Allegiance)'도 함께 낭독한다. 이 또한 미국에 대한 충성 맹세로 각급 학교에서나 웬만한 행사장에서 빠짐없이 행해진다. 충성서약의 순간은 사뭇 심각하다. 자신이 나고 자란 원래 조국을 포기하고 이 순간부터 미국만을 조국으로 섬기겠다는 다짐이고 약속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시민권 취득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naturalization'로 '귀화'라는 뜻이다. 한국 사람은 과거 일제 강점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이지 몰라도 귀화라는 말 자체에 상당히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런 충성 서약에 갈등을 느끼며 시민권 취득을 망설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국적에 대한 생각도 바뀌면서 한인들도 별 거리낌 없이 시민권을 신청하고 '미국 시민'이 된다. 한인 커뮤니티 차원에서도 정치력 신장이나 권익 수호를 위해 한인 시민권자가 늘어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오히려 시민권 취득을 독려하는 분위기다. 선서식장의 축제 분위기는 이제 더 이상 국적이 나를 규정하는 척도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민권자가 되는 길 현재 미국 시민이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미국 영토 안에서 태어남으로써 자연스럽게 미국 시민이 되는 것, 즉 출생시민권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외국 태생의 이민자가 귀화 신청을 하여 미국 당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시민권자가 되는 경우다. 전자인 출생시민권 제도는 속지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오랜 전통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 외국인 원정출산이나 서류미비자 자녀의 자동 시민권 취득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부각되면서 폐지 주장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귀화 신청에 따른 시민권 취득 역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면서 신청 자격가 진행 과정이 계속 까다로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과거에도 시민권 신청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오긴 했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권 신청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미리 내용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시민권 관장 부서인 '시민권 및 이민 서비스국(USCIS; US Citizenship and Immigration Services: 이하 이민국)' 안내 자료와 관련 웹사이트 등을 참고해 정리한, 개괄적인 시민권 신청 과정이다. #시민권 신청 자격 (1)만18세 이상 일 것. 18세 미만은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시민권을 받으면 자동으로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단, 그 자녀는 시민권을 받은 부모와 함께 미국 내에 거주하고 있고 그 자녀도 영주권자여야 한다. (2)영주권 취득 이후 5년이 지났을 것.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하는 경우는 영주권 취득 3년 만에 신청이 가능하다. (3)영주권자로 미국에서 5년 이상 지속적으로 거주했을 것. 이는 최근 5년 내 미국 외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1년 이상 체류하지 않았어야 함을 의미한다. (4)시민권을 신청하는 주에서 최소 90일 이상 거주했을 것. 실제 해당 주에 주소지가 있고 거주 사실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5) 기본적인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는 최소한 인터뷰 시 담당자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6)미국 정부나 사회, 역사 등에 대해 기본 지식을 갖고 있을 것. 이는 하루 아침에 준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 공부가 필요하다. 다만 시민권 신청 서류를 접수하고 지문까지 찍게 되면 이민국에서 주는 'Learn About the United States'라는 자료로 공부하면 된다. (7)선한 도덕과 바른 품성(Good moral character)을 지녔을 것. 이는 보통 중범죄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범죄 경력이 없어야 함을 말한다. 정직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미국이기 때문에 과거 범죄 사실을 숨기거나 가벼운 범법 사실이라 해서 무심코 넘어갔다가 발각되면시민권 거부는 물론, 영주권 취소나 심할 경우 추방까지 될 수 있다. 체포 기록이나 음주운전 적발 기록도 솔직히 쓰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렀음을 밝혀야 한다고 변호사들은 조언한다. #신청 후 선서식까지 시민권 신청서 제출부터 최종 선서식까지는 통상 6~8개월이 걸린다. 최근에는 이민 서류 적체 등으로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흔히 있다. (1) 시민권 신청 서류(N-400 form)를 꼼꼼히 작성한다. 양식은 이민국 웹사이트(www.USCIS.gov)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개인이 직접 해도 되고 민권 단체나 이민 변호사를 통해서 신청해도 된다. 작성된 신청서는 최근 사진 2장 등 필요한 서류와 함께 이민국으로 보내면 된다. 이때 신청 수수료 725달러(2019년 4월 현재)도 함께 보내야 한다. 시민권 신청시 본인 이름을 바꿀 수도 있다. (2)서류 접수 후 한 달 정도 지나면 지문을 찍으라는 편지가 온다. 그러면 지정된 장소로 가서 지문을 찍으면 된다. 지문 채취가 끝나면 최종 인터뷰 시험 준비를 위한 자료를 주는데 이것으로 공부하면서 인터뷰에 대비하면 된다. (3)인터뷰를 한다. 인터뷰 날짜가 잡히면 면허증, 여권(지금 여권, 과거 만료된 여권 포함), 영주권, 소셜시큐리티카드 등을 준비해 지정 장소에 시간 맞춰 가면 된다. 인터뷰는 보통 시민권 신청서에 기재한 내용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수준이다. 그 다음 미국 정부나 역사 등에 대해 질문하는데 10개 중 6개 이상 정답을 말해야 합격이다. 그 다음 영어 시험으로 간단한 읽기, 쓰기, 말하기 테스트를 받는다. 50세 이상으로 영주권 취득 20년이 지난 사람, 혹은 55세 이상으로 영주권 취득 15년이 지난 사람은 영어시험이 면제된다. 이들은 미국 사회 및 역사 시험도 통역을 통해 한국어로 볼 수 있다. 또 65세 이상이며 영주권자로 20년 이상 미국에 거주했을 경우엔 영어 시험 면제뿐 아니라 사회 및 역사 시험도 더 간단히 볼 수 있다. (4) 마지막은 서두에 말한 선서식이다. 선서식이 끝나면 바로 유권자 등록과 여권 신청을 할 수 있다. 보통 선서식장에 자원봉사자들이 나와 신청을 도와준다. 여권은 나중에 우체국에 가서 신청해도 된다. 이종호 논설실장

2019-05-04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상식 3] 연방헌법 - '우리 미 합중국 국민'이 만든 세계사적 문건

#. 연방헌법이 제정되기까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만큼 힘들고 가치 있는 것도 없다. 미국 건국이 그랬다. 사실 독립전쟁 이전 북미 13개 식민지는 17~18세기 유럽 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말은 신대륙이고 신세계였지만 구대륙의 낡은 전통과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은 여전했다. 미국 독립과 연방 헌법 제정은 매우 짧은 시간에 그런 구질서를 무너뜨리면서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완성된 답안은 없었다. 참고할 자료도 없었다. 모두 새로 시작하는 것이었던 만큼 당시 지도자들은 매사를 재차 생각하고, 거듭 논의해야 했다. 각 주의 이해관계에 따른 일진일퇴의 분투도 벌이면서 한걸음씩 나아가야 했다. 미국 헌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1787년 제정된 미국 헌법은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을 확립시켰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삼권분립에 따른 통치 구조, 인간의 기본 인권 등을 세밀하게 규정한 미국 헌법이 나온 후 수많은 나라에서 이를 참고하거나 모방해 자국 헌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뿌리는 100년 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임시헌장'에까지 닿아있다. 미국 헌법도 13개주가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하면서 만든 '연합규약(The Articles of Confederation)'이라는 뿌리가 있다. 연합규약은 1777년 대륙회의에서 초안이 작성되고 1788년 비준된 것으로 독립 후 연방의 역할과 권한을 처음 규정했다는 점에서 미국 헌법의 전신으로 인정받는다. 미국 역사에서 헌법제정회의, 곧 제헌회의로 기록된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는 원래는 이 연합규약을 손질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회의 참가자들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훗날 4대 미국 대통령이 됨)의 초안을 기초로 몇 달 동안 격렬한 토론과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연합'보다 훨씬 강력한 '연방' 결성이라는 성과를 도출해내고 역사적인 미합중국 헌법 초안까지 완성했다. 1787년 9월 17일 확정된 연방 헌법 초안은 이듬해부터 각 주에서 미합중국 국민(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의 이름으로 비준되기 시작해 1789년 3월 4일 미국 헌법으로 공식 발효됐다.(자세한 미국 헌법 제정 과정에 대해서는 본지 2018년 8월 20일자 A-12면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역사-연방헌법 편 참조) #. 미국 헌법 전문과 본문 미국 헌법은 전문과 총 7개조의 본문, 그리고 27개의 수정조항(Amendment to Constitution)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미국 헌법 전문을 한 번 읽어보자.(전문의 첫 세 단어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시민권 시험에 자주 나온다). "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in order to form a more perfect Union, establish Justice, insure domestic Tranquility, provide for the common Defense, promote the General Welfare, and secure the Blessings of Liberty to Ourselves and our Posterity, do ordain and establish this Constitution for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우리 미 합중국 국민은 더욱 완벽한 연방을 구성하고, 정의를 확립하며, 국내 안녕을 보장하고, 공동 방위를 도모하며, 모든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보장해주기 위해 이 미합중국 헌법을 제정한다.)" 다음 본문은 모두 7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첫 3개조는 연방정부를 입법 사업 행정 등 3개의 부로 나눈 권력 분립에 관한 것이다. 제4조는 각 주의 권리와 의무, 주 간의 관계를, 제5조는 헌법 개정 절차를, 제6조는 연방 최고 법으로서의 헌법에 대해 규정했다. 제7조는 헌법의 비준과 효력의 발휘에 관한 사항을 정하고 있다(미국 헌법은 주한미대사관 홈페이지(https://kr.usembassy.gov/ko)에 가면 한글로도 읽을 수 있다) . #. 수정헌법이란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제헌헌법 이후 모두 9번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개헌은 1987년에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 국회 국정감사권 부활 등이 주 내용이었다. 미국 헌법은 1787년 최초 제정 후 모두 27번 개정됐다. 한국의 개헌과 다른 점은 첫 헌법 내용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수정되거나 보완된 부분만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추가된 조항을 '수정헌법(Amendment)'이라 한다. 그중 1789~1791년 사이 발효된 제1조부터 제10조까지를 특별히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이라 부른다. 수정헌법 각 조항을 들여다 보면 미국 역사가 보편적 인권 확대의 역사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제1조부터 10조까지의 '권리장전'은 최초 헌법에 빠져 있던 언론, 집회의 자유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제13조는 노예제 폐지, 제15조는 흑인 참정권 규정이다. 1920년에 비준된 제19조는 여성 참정권 규정이다.(수정헌법 각 조항에 대한 내용은 위 표 참조) 마지막 수정헌법은 1992년 연방 상하원의 보수 변경을 허용한 제27조였다. 하지만 현재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수정헌법은 모두 26개 조항이다. 금주법 제정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8조가 1933년 수정헌법 제21조 제정으로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헌법 관련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문:미국 최고의 법은 무엇인가?(What is the supreme law of the land?) -답:헌법(The Constitution) ▶문:헌법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What does the Constitution do?) -답:정부 조직 구성(set up the government) /정부의 범위 규정(defines the government) /미국인의 기본권 보호(protects basic rights of Americans) ▶문:자치의 개념은 헌법의 첫 세 단어에 들어있다. 그 세 단어는 무엇인가?(The idea of self-government is in the first three words of the Constitution. What are these words?) -답:위 더 피플(We, the People)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의 세 단어를 말하면 된다. 헌법 전문은 위 본문 참조. ▶문:수정헌법이란 무엇인가?(What is an amendment?) -답:헌법에 대한 변경 사항 혹은 추가 조항을 말한다. a change(to the Constitution), 혹은 an addition(to the Constitution)이라 대답하면 된다. ▶문:수정헌법 중 처음 10개 조항을 무엇이라 부르는가?(What do we call the first ten amendments to the Constitution?) -답:권리장전 (The Bill of Rights) ▶문:첫 수정헌법의 권리나 자유 중 하나를 말해보라.(What is one right or freedom from the First Amendment?) -답:언론(speech), 종교(religion), 집회(assembly), 출판(press), 정부에 청원(petition the government) 중 하나를 대답하면 된다. 모두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기본권들이다. ▶문:미국 헌법은 모두 몇 개의 수정조항이 있는가?(How many amendments does the Constitution have?) -답:27개(twenty seven) 이종호 논설실장

2019-04-20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상식 2] 연방대법원 - 미국 역사의 물줄기 바꿔온 막후 주역

이민자들에겐 10년, 20년을 살았어도 미국은 여전히 낯설다. 입법-행정-사법 등 삼권분립은 알아도 별로 경험할 기회가 없는 사법부 쪽은 특히 더 잘 모른다. 그럼에도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상식 수준의 내용은 알아야 한다. 미국 정부 발행 시민권 시험 예상 문제집에도 연방대법원 등과 관계된 문항이 10개 쯤 있다. 연방대법원을 중심으로 미국의 사법제도를 일별해본다. ◆연방 법원과 주 법원 미국은 50개주가 모인 연방제 국가다. 연방법 다르고 주법이 다르다. 법원도 연방과 주가 따로 움직인다. 미국은 판례가 지배하는 불문법 체계다. 각각의 사건에 대해 그동안 내려진 판례를 기반으로 접근한다. 반면 한국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독일이나 프랑스에 기반한 성문법을 근간으로 이뤄져있다. 한국 법을 먼저 체득한 한인들이 미국 사법시스템을 어려워 하는 이유다. 그렇지만 법원이 3심급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같다. 우선 연방법원부터 보자. 최하급심인 1심 재판은 연방지방법원(District Court)에서 이뤄진다. 2019년 현재 전국에 94개가 있다. 2심인 항소심은 연방항소법원(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이 맡는다. 순회법원(Circuit Court)이라고도 불리며 전국에 13개가 있다. 순회법원이란 건국 초기 판사들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재판을 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물론 지금은 판사가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이들 위에 최종심인 연방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이 있다. 연방법원은 원칙적으로 연방헌법 및 연방법 아래서 발생하는 법률 분쟁을 취급한다. 또 일정 금액을 초과하는 서로 다른 주 시민 사이, 혹은 외국인과의 소송건도 다룬다. 각 주 법원도 대개는 3급심제로 1심법원→항소법원→대법원으로 구성된다. 주 법원 판사 선출은 각 주마다, 또 심급별로 뽑는 방식이 복잡하게 세분되어 있어 일률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크게 선거로 뽑는 경우와 주지사가 직접 임명하는 경우로 구분된다. 미국의 사법제도 중 생활 속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은 배심원(Jury)이다. 이는 법조인이 아닌 일반 시민이 재판 과정에 참여해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제도다. 소수의 법조 권력에 의해서 판결이 좌우되는 것을 막아 재판의 공정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취지다. 배심원 출석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 투표 참여와 함께 가장 먼저 누리고 이행해야 할 권리이자 의무다. 참고로 배심원들이 단순히 유죄냐 무죄냐를 결정하는 것을 소배심(petit jury)이라 하고, 형사재판에서 피의자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대배심(grand jury)이라 한다. 소배심은 무작위로 선정된 12명의 배심원이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대배심은 16~23명의 배심원이 비공개, 다수결로 진행한다는 점이 차이다. 소배심 케이스는 1995년 유명한 프로풋볼 선수였던 OJ 심슨이 연루된 살인사건 재판이 유명하다. 당시 흑인 9명, 중남미계 1명, 백인 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심슨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었다. 대배심이 관심을 끈 것은 2014년 미주리주 퍼거슨 시에서 흑인 청년이 백인 경관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사건 때다. 당시 배심원단은 일반의 법 감정과 달리 백인 경찰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배심원 제도의 공정성 여부가 도마에 올랐었다. ◆연방대법관 연방대법원 판사(대법관:Justice)는 대법원장을 포함해 모두 9명이다. 연방대법원장(Chief Justice)은 사법부 최고 수반이지만 판결 때는 다른 대법관과 똑같이 한 표의 투표권만 갖는다. 1789년 연방대법원 창설 후 지금까지 230년 동안 연방대법관에 임명된 사람은 102명뿐이다. 연방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연방상원 청문회와 표결을 거쳐 최종 임명된다. 대법관은 종신직으로, 한 번 임명되면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해고당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현직 대법관이 은퇴 의사를 밝히거나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에만 대법관 지명 기회를 갖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1933~1945년)은 9명이나 임명할 수 있었지만 카터 대통령(재임 1977~1980년)은 한 번도 지명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버지 부시와 빌 클린턴, 아들 부시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각각 2명의 대법관을 임명했다. 현직인 트럼프 대통령도 거센 반대를 뚫고 닐 고서치와 버렛 캐버노 등 보수 성향의 두 명을 대법관 자리에 앉혔다. 대통령이 대법관을 지명할 땐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의 인물을 지명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은 보수적이고, 민주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은 진보 성향을 띤다. 그렇지만 실제 판결에선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지명한 얼 워런 대법원장은 인종에 따른 학교분리법 철폐 등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미국의 진보적 변화를 이끌었다. 공화당인 아들 부시 대통령이 뽑은 존 로버츠 현 대법원장 역시 민주당 정부 정책인 오바마케어에 찬성표를 던졌다. 모두 정치로부터 사법부의 확고한 독립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현재 연방대법관 9명 중 5명은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했고, 4명은 민주당 대통령이 지명했다(표 참조). 연방대법원장은 2005년 임명된 존 G. 로버츠이다. ◆연방대법원 판결 연방대법원은 다음 세 가지 경우의 사건을 취급한다. 첫째 연방 하급법원에서 올라온 사건, 둘째 각 주 대법원에서 올라온 사건, 셋째 연방대법원이 1심 재판을 직접 관할하는 경우로 외국 고위인사 관련 사건이나 각 주끼리의 소송 등이다. 매년 연방대법원까지 올라오는 케이스는 1만 건에 달하지만 실제 심리하는 경우는 100~150건 정도다. 연방대법원은 일반 재판과 달리 사건의 유무죄를 가리거나 형량을 선고하지는 않는다. 대신 한국의 헌법재판소처럼 법률을 해석하고 법안이나 행정조치가 헌법에 위배되는지 아닌지 여부를 판결한다. 연방대법원에서 내린 판결은 다른 어떤 법원도 더 이상 항소할 수 없는 최종 판결이 된다. 그런만큼 연방대법원 판결은 미국 역사를 바꿀 만큼 큰 파급력을 지닌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최저 임금의 합법성을 처음 인정했고(1937년), 흑백 분리 교육시설이 불평등하다고 판결함으로써 흑인의 법적 지위를 실질적으로 향상시켰으며(1954년), 여성 근로자도 동일한 일을 하는 남성 근로자와 동등한 보수를 받아야 함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1974년), 동성결혼을 금지한 주 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함으로써 동성결혼 합법화 길을 연 것(2015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외에도 연방대법원은 각 시기마다 쟁점이 된 사회 이슈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림으로써 미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미국인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연방대법관 선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연방대법원 판결 하나하나에 뜨거운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사법부 관련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문:법치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the rule of law?) -답:모든 사람들은 법을 따라야 한다.(Everyone must follow the law.)/ 지도자는 법을 준수해야 한다.(Leaders must obey the law.)/ 정부는 반드시 법을 따라야 한다.(Government must obey the law.)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No one is above the law.) ▶문:정부의 한 부문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What stops one branch of government from becoming too powerful?) -답: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 / 권력분산, 즉 삼권분립 (separation of powers) ▶문:사법부는 무슨 일을 하는가?(What does the judicial branch do?) -답:법률 검토(reviews laws)/ 법률 해석(explains laws)/ 분쟁이나 다툼, 의견 불일치 해결(resolves disputes or disagreements)/ 법 조항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 판단(decides if a law goes against the Constitution) ▶문:미국의 최고 법원은 무엇인가?(What is the highest court in the United States?) -답:연방대법원(the Supreme Court) ▶문:연방대법원 판사는 몇 명인가?(How many justices are on the Supreme Court?) -답:9명 (nine) ▶문:현재 연방대법원장은 누구인가?(Who is the Chief Justice of the United States now?) -답:존 로버츠(John Roberts) / 존 G.로버츠 주니어(John G. Roberts, Jr.) 이종호 논설실장

2019-04-06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상식 1] 연방 의회-상원 100명, 하원 435명…미국 이끄는 '수퍼 파워'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뼈대다. 하지만 대통령제 국가는 대부분 행정부가 실질적인 권한을 더 많이 갖고 있다. 미국은 다르다. 입법부인 의회가 거의 모든 입법권을 행사하면서 정부 기관 운영이나 개별 정책을 견제 감독하고 사업 관련 예산도 좌지우지한다. 미국을 움직이는 수퍼 파워, 연방의회에 대해 알아본다. 미국 연방의회는 상원(Senate)과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 둘로 나뉘어져 있다. 역사적 배경이 있다. 건국 전 식민지 13개주는 사실상 독립국가였다. 이들이 모여 합중국이 됐다. 건국 과정에서 당연히 각 주의 대표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큰 쟁점이 됐다. 주마다 경제력도 다르고 인구도 차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큰 주와 작은 주 사이에 타협이 이뤄졌다. 각 주는 인구에 관계없이 2명의 의원을 똑같이 뽑아 상원에 보냄으로써 동등한 대표권을 가지도록 했다. 인구 비례에 따라서도 의원을 선출해 또 하나의 의회, 즉 하원을 구성키로 함으로써 인구가 많은 주도 배려했다. 연방의원 선거는 2년마다 시행된다. 한 번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에 같이, 또 한 번은 대통령 임기 중에 실시되는 중간선거다. 새 의회는 선거 다음 해 1월에 구성되며 2년 단위로 활동한다. 1789년 제1대가 시작된 이후 2019년 구성된 이번 의회는 제 116대가 된다. 116대 의회는 상원은 공화당이 53석으로 다수당이다. 하원은 작년 중간선거 결과 235석을 확보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표 참조>. 연방의회 의원은 헌법상 불체포 특권과 면책 특권이 있으며 다른 관직의 겸직은 금하고 있다. 상원 vs 하원 상원의원은 각 주에 2명씩 모두 100명이다. 임기는 6년. 매 2년마다 1/3씩 다시 뽑는다. 일단 한 번 상원의원이 되면 여간한 잘못이 없는 한 다시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유명 정치인 집안 출신들이 대를 물려가며 의원직에 머물러 있는 이유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은 6선의 여성 의원 다이앤 파인스타인(85)과 올해 초선의 이민자 출신 여성 카말라 해리스(54)의원이다. 하원의원은 모두 435명이다. 각 지역구는 10년에 한 번 실시되는 센서스 결과에 따라 50개 주에 배분된다. 현재 캘리포니아가 53개 선거구로 가장 의석이 많다. 인구가 적은 알래스카, 몬태나, 사우스다코타, 노스다코타, 버몬트, 와이오밍 등은 1석씩이다. 하원의원 임기는 2년이다. 선거 때마다 전원을 새로 뽑는다. 상대적으로 문호가 넓다보니 상원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하원의원으로 선출된다. 이번 116대 하원 구성을 봐도 여성 및 비백인 수가 크게 늘었다. 미네소타주에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무슬림 여성 하원의원이 탄생하기도 했다. 상원은 안보나 외교 등 국가 차원의 문제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 선전포고, 군대 파병, 연방정부 주요 관료 임명 동의, 외국과의 조약 승인 등이 대표적이다. 상원의장은 헌법 규정에 따라 현직 부통령이 겸하지만 표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부 동수인 경우에만 캐스팅보트를 행사한다. 하원은 임기도 짧고 의원 수도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권한과 위상은 상원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하원을 대표하는 하원의장(Speaker)은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에 이은 계승 서열 2위일 뿐 아니라 정치적 파워도 막강한 자리다. 하원 의장은 매 의회 초 다수당 의원총회에서 지명되고 하원 본회의에서 자동 선출된다. 현재 의장은 캘리포니아 출신의 민주당 낸시 펠로시 의원(79)이다. 의회 활동의 중심 '위원회' 연방의회 활동은 실질적으로 위원회별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의원들은 되면 전문성에 따라 여러 위원회(committee)로 나뉘어 배속되어 해당 분야의 입법 활동을 해 나간다. 위원회는 크게 상임위원회(Standing Committee)와 특별위원회(Select or Special Committee), 합동위원회(Joint Committee)로 나뉜다. 이번 116대 연방의회에선 상원에는 16개 상임위원회와 5개 특별위원회가 있고, 하원에는 20개 상임위원회와 3개의 특별위원회가 있다. 또 상하원 합동위원회는 4개다. 상임위원회는 이름 그대로 늘 있는 위원회를 말한다. 상원은 예산의 뼈대를 마련하는 예산위원회, 예산의 용처를 결정하고 승인하는 세출위원회, 외교정책 관련 법안을 마련하는 외교위원회, 국방정책 및 국방예산을 감독하는 군사위원회 등이 대표적이다. 하원의 경우 예산위원회와 군사위원회 등 상원과 같은 이름에 비슷한 역할을 하는 위원회도 있지만 과학·우주·기술위원회나 소상공인들을 위한 스몰비즈니스위원회, 정부 활동을 감시하면서 예산 낭비나 부정행위 등을 조사하는 개혁감독위원회 등 상원에 없는 위원회도 있다. 하원의 각 위원장은 관례적으로 다수당이 차지하며 일반 의원들은 보통 1~2개 위원회에 속해 있다. 각 상임위원회는 필요한 법안 제정을 위해 정부 관련 부처 전문가의 의견을 묻고, 청문회 등을 거쳐 법안을 도출한다. 그렇게 해서 마련된 법안은 본회의에 안건에 부쳐지고 하원 본회의와 상원 본회의를 모두 다 통과한 후 대통령의 서명으로 미국의 법이 된다. <입법과정 그래픽 참조> 상임위원회는 필요할 경우 직접 수사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요즘 자주 뉴스에 등장하는 트럼프 대통령 관련 러시아 대선 개입 의혹 조사 청문회 등도 이런 수사 과정이다. 또 상원의 각 위원회는 대통령이 지명한 관리들에 대한 지명자에 대해 인준 청문회를 주재하기도 한다. 특별위원회는 특정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 구성되는 위원회다. 현재 상원엔 윤리, 정보, 노령, 원주민, 국제마약통제 위원회 등 5개 특별위원회가 있다. 하원에는 정보, 기후변화, 의회현대화 위원회 등 3개 특별위원회가 활동 중이다. 상하원 합동위원회는 경제, 출판, 조세, 도서관 위원회 등 4개가 있으며 모두 국민 생활과 직접 관련된 현안을 관장한다. 연방의회 관련 시민권 시험 예상 문제 ▶문:연방법은 누가 만드는가?(Who makes federal laws?) -답:의회 Congress / 상원과 하원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 미 연방 또는 입법부 (US or national) legislature 중 하나만 말하면 된다. ▶문:미국 연방의회는 두 개로 되어있다. 무엇인가? (What are the two parts of the US Congress?) -답:상원과 하원 the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문:상원의원은 몇 명인가?(How many US Senators are there?) -답:100명 (one hundred) ▶문:상원의원의 임기는 몇 년인가(We elect a US Senator for how many years?) -답:6년 (six years) ▶문:당신이 사는 주 상원의원 한 명만 말해 보라.(Who is one of your state's US Senators?) -답:캘리포니아주는 다이앤 파인스타인(Diane Feinstein)과 초선의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다. 뉴욕주는 척 슈머(Chuck Schumer)와 커스틴 질리브랜드( Kirsten Gillibrand)다. 다른 주도 웹사이트 (www.senate.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하원에는 몇 명의 표결 의원이 있는가?(The House of Representatives has how many voting members?) -답:435명 (four hundred thirty-five) ▶문:하원의원의 임기는 몇 년인가?(We elect a U.S. Representative for how many years?) -답:2년 (two) ▶문:당신이 사는 지역의 하원의원은 누구인가? (Name your US Representative.) -답:캘리포니아는 모두 53명의 연방 하원의원이 있다. 토런스, 사우스베이 등이 포함된 33지구는 캐런 배스(Karen Bas), LA한인타운이 속해 있는 34지구는 지미 고메즈(Jimmy Gomez)의원이며 2018년 중간선거에서 한인 영 김 후보가 아깝게 낙선했던 풀러턴, 브레아 등의 39지구는 길 시스네로스(Gil Cisneros)가 현역 하원의원이다. 각 지역 하원의원 명단은 웹사이트(www.house.gov)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미국 상원의원은 누구를 대표하는가?(Who does a US Senator represent?) -답:그 주의 모든 주민들(all people of the state) ▶문:어떤 주는 하원의원이 상원의원보다 더 많다. 왜 그런가? (Why do some states have more Representatives than other states?) -답:인구가 많아서(Because they have more people) / 인구 수에 따르기 때문에( Because of the state's population) 이종호 논설실장

2019-03-23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10·끝] 미국인은 왜 성조기와 자유의 여신상에 열광할까

미국 가정을 보면 평소에도 성조기를 내건 집들이 많다. 스포츠 경기나 행사, 이벤트 등 어디서든 '오 세이, 캔유 시…'를 부른다. 참전용사나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예우나 대접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하다. 어떻게 그런 행동들이 가능할까. 답은 역사에 대한 이해다. 이 나라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넘쳐나는 애국심과 미국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은 생활화된 역사에서 나온다. 시민권을 딴다는 것은 그런 그런 미국 역사와 자부심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미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한인 수는 200만 명에 육박한다. 그들에겐 이제 미국이 삶의 터전이고 내 후손이 살아가야 할 땅이 됐다. 미국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런 인식을 북돋우는 출발점이다. 역사는 단순히 한 사회가 거쳐 온 변화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너와 나 개인들을 '우리'라는 공동체로 이어주는 튼실한 동아줄이다. 미국 시민권 시험에서 역사 문제의 비중이 그렇게 높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민국 발행 '시민권 시험 예상 문제' 88번부터 100번까지는 미국 전반에 대한 상식을 묻는다. 하지만 모두가 역사적 배경이 있다. 문제풀이를 통해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 미국 영토 -문: 미국령 하나만 말해보라. (Name one US territory.) -풀이: 테리토리는 아직 정식으로 주(State)가 되지 않은 미국 영토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 50개주 가운데 독립 당시 13개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들도 대부분 처음엔 테리토리로 존재하다가 일정 요건을 갖춘 뒤 주로 승격되고 연방에 편입되었다. 테리토리 경력(?)이 없었던 주는 초기 13개 식민지주 외에 켄터키와 웨스트버지니아(버지니아서 분리), 메인(매사추세츠에서 분리), 캘리포니아(멕시코서 할양받은 후 테리토리가 되기 전 바로 연방 가입), 버몬트와 텍사스(처음 독자 공화국으로 출범했다가 후에 연방 가입) 등 19개 주이며 나머지 31개 주는 모두 테리토리였다가 주가 되었다. 현재 미국령 테리토리는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버진아일랜드(US Virgin Islands) /사모아(American Samoa) /북 마리나제도(Northern Mariana Islands) /괌(Guam) 등 5곳이다. #. 국경 -문: 캐나다와 국경을 맞댄 주 하나만 말해 보라. (Name one state that borders Canada.) -풀이: 미국은 북쪽은 캐나다, 남쪽은 멕시코와 국경을 접한다. 캐나다와는 모두 13개 주가 접하고 있다. (지도참조). 동쪽에서부터 메인(Maine) /버몬트(Vermont) /뉴햄프셔(New Hampshire) /뉴욕(New York)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 /오하이오(Ohio) /미시간(Michigan) /미네소타(Minnesota) /노스다코타(North Dakota) /몬태나(Montana) /아이다호(Idaho) /워싱턴(Washington) /알래스카(Alaska) 등이다. 또 맥시코와 국경을 접한 주를 묻기도 하는데 캘리포니아(California) /애리조나(Arizona) /뉴맥시코(New Mexico) /텍사스(Texas) 등 4개 주 중 하나를 답하면 된다. #. 강 -문: 미국의 제일 긴 강 두 개 중 하나만 말해 보라.(Name one of the two longest rivers in the United States.) -풀이: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따르면 미국서 가장 긴 강은 중북부를 흐르는 미시시피강의 지류인 미주리강(Missouri River, 3768km)이다. 정작 본류인 미시피강(Mississippi River, 3544km)은 두 번째 긴 강이다. 이 두 강은 세인트루이스에서 합쳐져 멕시코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데 미시시피-미주리강은 총 길이 6270km로 나일-아마존-양쯔강에 이어 세계 4번째 긴 강이 된다. 미국에서 세 번째 긴 강은 알래스카의 유콘강(3185km)이고 남쪽 멕시코와의 국경을 이루는 리오그란데강(2830km)이 네 번째, LA 등 남서부 도시의 젖줄인 콜로라도강(2330Km)이 다섯 번째 긴 강이다. #. 바다 -문: 미국의 서쪽 해안에 있는 바다는 무엇인가? (What ocean is on the West Coast of the United States?) -풀이: 태평양(Pacific Ocean)이다. 동쪽 해안(East Coast)을 묻기도 하는데 그때는 대서양(Atlantic Ocean)이라 답하면 된다. 미국의 남쪽 바다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이다. #. 미국 상징 -문: 자유의 여신상은 어디에 있나?(Where is the Statue of Liberty?) -풀이: 19세기 말 이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허드슨강 입구 뉴욕 항구로 들어온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본 것이 횃불을 높게 치켜든 거대한 여신상, 즉 자유의 여신상이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증정했으며 1886년 10월 28일 뉴욕항 입구 리버티 섬에 세워졌다. 프랑스 조각가 프랑스의 조각가 프레데릭 오귀스트 바르톨디와 훗날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브 에펠이 협업하여 만들었다. 땅바닥에 제일 위쪽 횃불까지 여신상 전체 높이는 93.5m에 이른다. 대표적인 미국의 상징물이기도 한 뉴욕 자유의 여신상은 인근의 엘리스섬과 함께 준국립공원(National Monument)으로 지정돼 있으며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답은 뉴욕(New York), 뉴욕항(New York Harbor)이며 리버티섬(Liberty Island), 뉴욕시(New York City), 허드슨강(Hudson River)도 답으로 인정해 준다. #. 수도 -문: 미국의 수도는? (What is the capital of the United States?) -풀이: 워싱턴DC (Washington DC)다. DC는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다. 50개 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도의 행정구역이며, 아래는 버지니아, 위는 메릴랜드에 둘러싸여 있다. 식민지 시대 미국의 경제 행정 중심 도시는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였다. 독립전쟁 승리 이후 신생 미국의 첫 수도는 뉴욕이었다. 1789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조지 워싱턴이 뉴욕에서 취임하고 집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국 직후부터 수도 이전 논의가 있었고 13개주 대표들의 협상과 타협 끝에 버지니아와 델라웨어 접경 포토맥강 유역이 새 수도로 확정됐다. 새 수도 이름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미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념해 '워싱턴 DC'로 붙여졌다. 수도 건설은 프랑스인 도시계획 전문가 피에르 랑팡이 맡았다. 1790년부터 10년간의 공사가 진행됐으며 공사 기간 동안은 필라델피아가 임시수도가 되었다. 이후 1800년 11월, 임기를 얼마 남놓지 않은 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이 워싱턴으로 집무실을 옮겨오면서 워싱턴 DC가 미 합중국의 공식수도가 되었다. 1801년 취임한 3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새 수도에서 취임한 첫 대통령이 되었다. #. 국기 -문: 왜 성조기에는 13개 줄이 있나?(Why does the flag have 13 stripes?) -풀이 : 13개의 줄무늬와 50개의 별로 구성된 성조기(星條旗)는 별과 막대기가 그려진 깃발이라는 뜻으로 'Stars and Stripes'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13개 줄은 최초의 13개 식민지, 50개의 별은 50개 주를 의미한다. 13개 최초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because there were 13 original colonies) /최초 13개 식민지를 상징하기 때문(because the stripes represent the original colonies) 등으로 답하면 된다. -문: 왜 성조기의 별은 50개일까?(Why does the flag have 50 stars?) -풀이: 별은 별 하나 하나가 각각의 주를 의미한다(because there is one star for each state ) /각각의 별은 하나의 주를 상징한다(because each star represents a state) /50개의 주가 있기 때문이다(because there are 50 states) 등으로 대답하면 된다. #.국가(國歌) -문: 미국 국가 이름은 무엇인가?(What is the name of the national anthem?) -풀이: 답은 스타 스팽글드 배너(The Star-Spangled Banner)다. 1889년 미 해군이 군가로 채택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1931년 연방의회 결의를 거쳐 공식 국가가 되었다. 1812년 벌어진 영국과의 전쟁 당시 영국 군함에 억류돼 있던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가 영국 군함으로부터 밤새도록 포격을 받고도 꿋꿋이 서 있던 맥핸리 요새의 깃발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써내려간 시 '맥헨리 요새의 방어전(Defence of Fort McHenry)'가 가사의 원문이다. 단어나 문장 구조가 1세 이민자들에겐 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가사가 19세기 초에 작성된 탓도 있다. 전체 3절이며 주로 1절만 불린다.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ough the perilous fight, O'er the ramparts we watche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O say, does that star-spangled banner ye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오, 그대는 보이는가, 새벽 이른 여명 사이로 황혼의 미광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넓은 줄무늬와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저 깃발)이,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우리가 지켜낸 요새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고 있는 것이. 포탄의 붉은 섬광과 공중에서 작렬하는 포탄이 우리의 깃발이 밤새도록 꿋꿋이 휘날리고 있었음을 증명할지니 오, 말해다오. 성조기는 여전히도 휘날리고 있는가? 자유의 땅과 용자들의 고향에서! #. 연방공휴일 -문: 미국 국경일 중 2개를 말해 보라. (Name two National U.S. holidays.) -풀이: 미국의 연방 공휴일은 총 10개다(날짜와 유래는 표 참조). 1월부터 순서대로 새해 첫 날(New Year's Day) /마틴 루터 킹 데이(Martin Luther King, Jr. Day) /프레지던트 데이(Presidents' Day) /메모리얼데이(Memorial Day)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노동절(Labor Day)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 /베테런스 데이(Veterans Day)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크리스마스(Christmas) 등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2018-12-23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역사] 미국인의 자부심 '워싱턴·제퍼슨·링컨·루스벨트…'

미국 역대 대통령은 모두 45대 44명이다. (대수에 비해 한 명이 적은 것은 22대 클리브랜드 대통령이 한 번 건너 다시 24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한인들이 미국 대통령을 기억하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숫자도 많을 뿐더러 미국 역사에 대해서도, 영미식 이름 자체도 입에 붙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미국에 살면서 상식적으로 기억해야 할 대통령은 있다. 조사 때마다 순위는 바뀌어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대통령 '톱5'에 늘 들어가는 다섯 명이다. 이들이 미국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왜 존경받는지 간단히 알아본다. # 초대 조지 워싱턴 (재임 1789~1797)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구심점으로 '건국의 아버지'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업적이다. 건국 후에도 군사 독재나 군주제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생 미국의 기초를 닦았고, 179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친 뒤 종신대통령으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후진에게 길을 열어줬다는 점도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받는다. 미국 대통령이 한 번만 중임할 수 있도록 관례화 된 것은 워싱턴의 이런 결단 덕분이었다. (이는 훗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직전까지 불문율로 이어졌고, 이후 1951년 수정헌법으로 성문화되었다.) # 3대 토머스 제퍼슨(1801~1809) 1776년 7월 4일 발표된, 자유와 평등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 대통령이 된 후 가장 큰 업적은 1803년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 강 서부 루이지애나 땅을 매입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기존 영토를 두 배로 넓히며 서부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만약 그때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지 않았더라면 미국 영토는 북미 동부지역으로 제한됐을 거라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2달러 지폐에 얼굴이 들어가 있다. 2달러 지폐는 잘 유통되지는 않지만 행운을 불러온다고 해서 인기가 높다. # 16대 에이브러햄 링컨(1861~1865) 최고의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노예해방이다. 미국은 자유의 땅이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독립선언문은 주장했지만 흑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을 링컨 대통령이 바로 잡고 노예제를 폐지한 것이다. 그러나 남북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영원히 분열될 수도 있었던 미국을 관용과 포용으로 지켜냈다는 것을 더 중요한 업적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불굴의 의지로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룬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란 점에서도 미국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1909)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민병대를 이끌고 쿠바로 건너가 케틀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국민적 영웅이 됐다. 대통령 재임 중엔 소수 기업 독과점 철폐, 철도 운영의 국가 통제, 재벌과 노조 간 중재 및 국가의 적극 개입, 노동자 보호 입법, 자원보존 정책 등을 왕성하게 펼쳤다.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 러일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1906년 미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곰 사냥을 나갔다가 주최측이 대통령을 위해 미리 생포해 놓은 곰을 그냥 놓아주라고 한 것이 화제가 되어 '테디 베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1933~1945)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번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서도 탁월한 지도력으로 국난을 극복하며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추진한 대규모 정부 사업 '뉴딜정책', 실업보험과 연금 등의 사회보장제도 마련이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전후 유엔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 기구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부인이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였다. 애증의 250년…역사 속의 한미관계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가 당시 조선 수군에 의해 침몰당했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1871년 강화도를 침략, 조선 군대와 전쟁까지 벌였다. 이를 신미년 서양 오랑캐의 소동이란 뜻에서 조선은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미국은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으로 기록했다. 18대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 때다. 최근 절찬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도입부도 신미양요가 배경이다. 이후 21대 체스터 아서 대통령 때인 1882년, 미국과 조선은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이듬해 아서 대통령은 조선 최초의 서방 외교사절단인 보빙사를 뉴욕에서 접견했다. 이후 미국은 여러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송해 의료, 교육 부문에서 조선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를 도왔다. 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표방, 1919년 3·1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원했고, 6·25 한국 전쟁을 계기로 둘도 없는 우방이 되었다. 한국을 공식 방문한 첫 미국 대통령은 1960년 아이젠하워(사진)였다. ---------------------------------------------------------------------------------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행정부의 최고 책임자는 누구인가?(Who is in charge of the executive branch?) ▶군대 최고 통수권자는 누구인가(Who is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military?) ▶법 제정시 최종 서명자는 누구인가(Who signs bills to become laws?)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Who vetoes bills?) -답:모두 대통령(the President)이다. ▶문:대통령의 임기는 몇 년인가?(We elect a President for how many years?) -답:4년 (Four) ▶문:대통령 선거는 몇 월에 하나?(In what month do we vote for President?) -답:11월(November) ▶문:현재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What is the name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Now?) -답:도널드 트럼프(Donald John Trump)이다. 간혹 소속 정당을 묻기도 한다. 답은 공화당(Republican)이다. 직전 44대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였고 소속은 민주당(Democratic)이었다. ▶문:대통령 유고시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If the President can no longer serve, who becomes President?) -답:부통령(the Vice President)이다. 그 다음 승계자는 연방 하원의장(the Speaker of the House)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2018-12-01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역사] '사람 대접' 받기 위한 피와 눈물의 투쟁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수전 B. 앤서니는 무슨 일을 했는가?(What did Susan B. Anthony do?) 답: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사회운동가로 여성 참정권 운동,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여성 권리를 위한 투쟁(Fought for women's rights) / 민권 투쟁 (Fought for civil rights)이 모범 답안이다. ▶문:인종 차별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한 것은 무슨 운동인가?(What movement tried to end racial discrimination?) 답: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해 1960년대에 본격화됐다. ▶문: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무슨 일을 했는가?(What did Martin Luther King, Jr. do?) 답: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며 미국 정신의 상징이 됐다. 질문엔 민권 투쟁(Fought for civil rights) / 모든 미국인들의 평등을 위한 노력(Worked for equality for all Americans) 등으로 대답하면 된다. --------------------------------------------------------------------------------- 미국은 독립한지 250년이 못됐지만 일찌감치 세계 일등 국가가 됐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끄러운 장면들이 많다. 더 놀라운 것은 많은 미국인들이 그런 수치의 역사에 맞서 싸우며 끊임없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흔히 '미국의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자유와 평등, 인권과 관용은 바로 그런 투쟁의 산물이다. 미국인의 저항정신을 대표하는 민권운동에 대해 알아본다. #. 여성 참정권 운동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채 100년이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연방헌법 제정 당시 참정권 부여 문제는 각 주의 소관에 맡겼다. 그러자 대부분의 주는 납세와 재산소유 정도에 따라 투표권을 제한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런 제한이 철폐됐다. 그럼에도 참정권은 여전히 백인 남성만의 문제였고 흑인과 여성은 아무런 해당상황이 없었다. 그들이 진짜 '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땀과 눈물, 더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1848년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최초의 여성 대중 집회가 뉴욕주 세네카폴스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은 법 앞에서의 남녀 평등, 교육과 고용에서 기회 균등, 여성 참정권 등을 요구했다. 이후 여러 여성 단체가 생기면서 여성 인권 향상과 구체적인 참정권 획득 노력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람이 수전 B. 앤서니(Susan Brownell Anthony, 1820~1906)였다. 1872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어느 날, 앤서니는 밧줄로 몸을 묶은 채 뉴욕주 로체스터 선거 사무실에 나타났다. "투표권 없는 자유는 가짜"라며 그녀는 유권자 등록을 강행했고, 며칠 뒤 금지된 투표까지 했다. 하지만 "여자가 어찌 감히 투표를"이라며 격분한 한 남자가 그녀를 고발했다. 100달러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앤서니는 부당한 벌금은 낼 수 없다며 납부를 거부하며 여성 인권 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앤서니가 여성 차별을 실감한 것은 교사로 근무했던 학교에서였다. 당시 여교사 연봉은 남자 교사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쳤다. 이런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앤서니는 30세에 교직을 떠났고 그 때부터 여성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낸 고정관념과 여성차별이라는 편견에 맞서 평생을 싸웠던 앤서니는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녀의 분투는 사후 14년만에 결실을 맺었다. 1920년 미국 수정헌법 19조는 "성별의 차이 때문에 선거권이 거부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며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 흑인 민권운동 노예해방 선언 이후 100년 가까이 흘렀지만 미국은 여전히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만의 세상이었다. 흑인의 지위도 2등 국민에 머물러 있었다. 1870년 수정헌법 15조로 투표권은 부여됐지만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는 흑인은 거의 없었다. 특히 남부 여러 주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방해했다. 문맹검사(Literacy test)까지 도입해 헌법을 해독하고 글을 읽고 쓸줄 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험까지 보게 하며 투표를 막았다. 시험지엔 비누 거품 속 물방울이 몇 개인지를 묻는 황당한 문항까지 있었다. 흑백분리 정책도 공공연히 자행됐다. 이른 바 짐 크로법(Jim Crow Laws)에 따라 흑인은 백인과는 다른 학교를 다녀야 했고 열차, 식당, 호텔 등의 출입도 제한됐다. 공원 수도꼭지도 흑백이 분리되어 있었고 공공 화장실 역시 유색인종(Colored)이라고 쓰인 것만 사용해야 했다. 근거는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이었다. 이는 혼혈이었던 호머 플레시가 백인 전용 1등석 객차에 탔다가 체포된 후 제기한 소송에서 시작됐다. 결국 당시 퍼거슨 판사가 있던 루이지애나 법원은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일 뿐"이라며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흑인에게 시민권을 주고 투표권을 부여했던 수정헌법 14조, 15조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도 남부 중심으로 '합법적인 흑인 차별'이 만연했던 것은 이 판결의 영향이었다. 그래도 변화의 바람은 거스를 수 없었다.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에 8살 흑인소녀 린다 브라운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흑백분리 정책에 따라 집 바로 근처 학교를 두고도 1마일이나 떨어진 흑인 학교를 날마다 걸어서 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은 전학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유명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소송의 시작이었다. 3년만인 1954년 5월 마침내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는 명백한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60년 가까이 미국 사회를 지배해 온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뒤집은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이제 흑백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남부의 학교들은 여전히 흑인 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0년대 말까지도 흑백 통합학교에 다니는 흑인 학생은 여전히 1%가 되지 못했다.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에선 흑인 학생 9명이 백인 중심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 했지만 주지사는 군대를 동원해서까지 이들을 막았다. 9명 학생들은 온갖 멸시 수모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견뎌냈다. 이들 '리틀록 9인'은 52년 뒤, 2009년 흑인 첫 대통령 버락 오바마 취임식에 초청받는 영광을 누렸다. 이 무렵 흑인 젊은이들은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앉아 주문하는 싯인(Sit in)운동 등을 펼치며 차별에 항거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일어났다. 1955년 12월 1일 흑인 여성 재봉사 로자 파크스(Rosa Parks, 1913~2005)가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이 사건은 곧바로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로자 파크스를 지지하며 흑백차별 철폐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흑인들의 버스 승차 거부운동도 이어졌다. 운동의 중심엔 26세의 젊은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 있었다. 킹 목사는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함께 381일간 버스 안타기 운동을 전개했다. 1년 뒤 연방 대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바탕을 둔 평화적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킹 목사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63년 6월, 케네디 대통령은 흑인에 대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차별 철폐를 규정한 새로운 민권법을 제안했다. 남부 여러 주들은 필사적으로 법안 저지에 나섰다. 민권운동가들은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대규모 '워싱턴 행진'을 기획했다. 25만 명이 모였다. 그들 앞에서 킹 목사가 연설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아이들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연설로 기록됐다. '아이 해브 드림(I have dream)'이란 연설이었다. 킹 목사는 1964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그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1968년 암살당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86년부터 1월 셋째주 월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개인의 탄생일이 연방 공휴일이 된 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64년 마침내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공식 발효됐다. 미국에선 더 이상 인종, 민족, 출신 국가, 종교와 성별에 따른 차이로 차별할 수가 없게 됐다. 1965년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도 통과됐다. 피부색에 따른 투표권 제한을 금지시킨 법이었다. 이후 흑인의 투표율은 70% 이상으로 치솟았다. 흑인 정치 지도자들이 잇따라 배출되었고 흑인의 지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2008년 흑인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 공짜 자유는 없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파란과 곡절 끝에 얻어진 평등의 권리, 그 과정을 미국 역사는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이라 부른다. 1954년 브라운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과 1955년 로사 파크스에 의한 버스 승차 거부운동으로 시작했고,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으로 결실을 맺은 민권운동의 과실은 이제 흑인 뿐 아니라 아시안 이민자를 포함해 다른 모든 소수자들도 함께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이런 관용과 평등을 부정하며 '그들만의 번영'을 추구하려는 부류가 여전히 있다. 당파적 이익에만 골몰하는 정치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원리주의 종교인, 편견에 물든 인종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또한 여전히 있어 미국은 건재하다. 어느 시대나 발전의 걸림돌은 배척받던 소수자가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던 기득권 세력 그들 자신이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 미국 민권운동 관련 주요 연표 ▶1862년 :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선언 ▶1866년 : 수정헌법 14조 비준(흑인에게도 시민권 인정) ▶1870년 : 수정헌법 15조 통과(흑인에게도 투표권 부여) ▶1896년 :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 (흑백 차별은 구별일 뿐 위헌이 아님을 인정) ▶1920년 : 수정헌법 19조 발효(여성 참정권 인정) ▶1954년 :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 (공립학교의 흑백 분리 교육은 위헌 판결) ▶1955년 :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카운티서 로자 파크스 체포. 흑인들 버스 승차거부 운동 전개. ▶1956년 : 연방대법원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 판결 ▶1957년 : 9명의 흑인 학생 아칸소주 리틀록 센트럴고교 등교 시위 ▶1961년 : 프리덤 라이더 운동(민권운동가와 대학생들이 흑백 분리 반대를 위해 장거리 버스를 타고 남부지역 순회) ▶1963년 : 워싱턴 행진, 킹 목사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사진) ▶1964년 : 민권법 제정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등에 따른 일체의 차별 철폐) ▶1965년 : 투표권법 제정 (피부색에 따른 투표 제한 일체 금지) ▶1968년 : 마틴 루터 킹 목사 피살 이종호 논설실장

2018-11-12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7]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이고 미국 역사가 곧 세계 역사였다. 1940년대 미국 인구는 세계 인구의 7%에 지나지 않았지만 경제력은 압도적이었다. 세계 자동차의 70%, 전화의 50%, 라디오의 45%, 철도의 35%를 갖고 있었다. 또 석유의 59%, 커피의 53%, 고무의 50%, 설탕의 25%를 소비하고 있었다. 이런 풍요의 이면에는 역설적이게도 전쟁이 있었다. 미국 이민국 발행 시민권 시험 예상 문제집에는 20세기 미국이 치른 주요 전쟁과 관련된 문항이 5개나 나온다(아래 문제 풀이 참조). 미국이 참전한 20세기 주요 전쟁을 살펴본다. #. 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가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세르비아 독립운동에 가담한 청년의 거사였다. 곧 오스티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공격했고 뒤이어 독일이 뛰어들었다. 이탈리아가 독일편에 섰다. 터키(오스만투르크)도 이들 삼국동맹 편에 가담했다. 영국-프랑스-러시아는 3국 협상으로 맞섰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우드로 윌슨. 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남부 출신 대통령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대서양 건너 '유럽전쟁'에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미국 선박이 위협받고, 결정적으로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침몰로 미국인 120여명이 숨지자 더 이상 중립에 머물 수 없게 됐다. 거기에 '치머만 전보 사건'까지 터졌다. 미국이 참전할 경우 멕시코가 독일 편에 서 준다면 전쟁이 끝난 뒤 텍사스와 애리조나 등 미국에 빼앗긴 땅을 되돌려 주겠다며 독일이 멕시코에 비밀리에 보낸 전보가 발각된 것이다. 1917년 4월, 결국 윌슨은 참전을 선언했다. 당시 미국 정규군은 고작 22만 명, 주 방위군 45만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즉각 징병제를 실시하고 200만 명의 군대를 유럽에 파병했다. 밀리던 연합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1918년 11월, 마침내 연합국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났다. 이 전쟁으로 1000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참전한 미군도 전사자 5만3000명을 포함해 1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 후 미국은 육해공군 합쳐 500만 명의 군대를 가진 세계 최대 군사대국이 되었다. 윌슨은 평화 14개 원칙을 발표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세계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야심이었다. 하지만 국제정치라는 현실의 벽은 높았다. 윌슨은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했지만 정작 미국은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의 모든 책임을 떠안은 독일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더 큰 세계 전쟁이 기다리고 있음은 그때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와 일본이 독일과 보조를 맞췄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전격적으로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미군 병사 2400명이 수장되고 149대의 전투기와 주요 항공모함, 전함들이 태평양에 가라앉았다. 그 다음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삼국동맹에 따라 사흘 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 했다. 미국은 제2차 대전의 핵심 당사국이 됐다.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유럽에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초반 열세를 극복하며 일본을 수세로 몰아 세웠다. 때마침 '맨해튼 프로젝트'로 핵 개발을 끝낸 미국은 1945년 8월 인류 최초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잇따라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그 전, 1945년 4월, 무솔리니가 붙잡혀 처형되고 히틀러도 자살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2차 대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군인, 민간인 합쳐 5300만 명이나 됐다. 미군은 30만 명 가까이 전사했고 70만 명이 부상당했다. 대공황을 이겨내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루스벨트 대통령은 '위대한' 4선 대통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뒤를 이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2차 대전을 종결지었지만 인류 최초의 핵 폭탄 투하 결정을 내린 대통령이라는 '멍에'를 쓰게 됐다. #.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전쟁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1950년 7월 19일 참전을 결정했다. 한국전 기간 동안 178만 명의 미군이 투입됐다. 태평양전쟁 때보다 50만톤이 많은 폭탄이 투하됐다. 북한 지역은 멀쩡한 건물이 없을 정도로 초토화됐다. 미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미군 사망자는 총 5만4260명이었다. 이중 전사자는 3만3643명, 나머지는 질병이나 사고 등에 의한 희생자였다. 한국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군 사망자는 13만 8000명이었다. 북한군은 52만명, 중공군은 13만 6000명이 죽었다. 민간인 사망자는 남북한 합쳐 53만 명이 넘었다. 이렇게 큰 희생을 남긴 전쟁이었지만 미국에서 한국 전쟁은 곧잘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다. 일반 역사책엔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이 적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한국전쟁을 소개한 지면은 많아야 한 두 페이지다. #. 베트남전쟁 워싱턴 DC 베트남전 기념관엔 매년 2000만 명의 참배객이 방문한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5만8000명의 미군 이름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그들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먼 아시아 국가에서 희생된 아버지, 삼촌, 형제, 아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꽃을 바친다. 베트남전쟁의 뿌리는 복잡하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맞서 싸운 베트남은 1954년 마침내 프랑스를 몰아냈다. 제네바협정이 맺어졌고 한반도가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되 2년 안에 선거를 통해 통일 국가를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이 반대했다. 냉전이 한창인 상황에서 동남아의 공산화 도미노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급기야 미국은 통킹만에서 미국 선박이 먼저 공격 받았다는 이유로(훗날 조작, 날조됐음이 밝혀졌다) 북베트남을 폭격했다. 베트남전쟁의 전쟁 시작이었다. 미국에게 베트남은 수렁이자 굴욕이었다. 2차 대전 때 유럽과 일본에 투하한 것보다 2배나 많은 폭탄으로 베트남을 초토화시켰지만 베트콩 게릴라들의 저항의지를 꺾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런 미친 전쟁은 끝내야 합니다." 반전시위가 전국적으로 물결을 이루었다. 1968년 음력 설 대공세로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은 베트콩의 수중에 넘어갔다. 사실상 승패는 결정됐다. 1973년 종전협정인 파리협정이 맺어졌고 미군은 철수했다. 2년 뒤, 월남은 완전히 패망했고 베트남은 사회주의 베트남으로 통일됐다. #. 페르시안 걸프전쟁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 점령하자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영국·프랑스 등 34개 다국적군 68만 명이 이라크를 공격했다. 주력은 43만 병력의 미군이었다. 이들은 패트리엇 미사일, 스텔스 폭격기 등 최첨단무기와 압도적 화력으로 이라크군을 무력화시켰다. 전쟁은 42일간 계속됐다. 폭격 장면은 TV로 생중계됐다. 이라크군은 10만 명이 죽었다. 다국적군은 378명이 전사했다. 미군 희생자는 150명이었다. #. 전쟁, 누군가는 남는 장사 따지고 보면 미국만큼 전쟁이 '체질화 된' 나라도 없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웠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으며 전쟁을 통해 초강대국이 되었다. 1776년 독립 선언 이후 지금까지 240여년 동안 공식적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해는 채 30년이 안 된다. '영구 전쟁국가'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23년간 미 육군 장교로 복무한 앤드루 바세비치는 '워싱턴 룰-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박인규 옮김, 2013년 발간)라는 책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미국은 그들만이 세계를 이끌고 구원하며 궁극적으로 변형시킬 임무와 특권을 갖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 신념은 미국이 개입하는 온갖 전쟁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면서도 미국이 결코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누군가는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는 바세비치의 지적이 아니어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정부 관리, 거대 방위산업체와 대기업, 그리고 그들을 위한 로비스트, 군 장교, 여러 국가안보기구의 요원, 언론인, 대학과 연기기관의 정책 전문가들이다. ---------------------------------------------------------------------------------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1900년대에 미국이 참전한 전쟁 한 가지만 말해 보라.(Name one war fought by the United States in the 1900s.) 답: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모범 답안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 5개다. 세계 1차대전(World War I), 세계 2차대전(World War II), 한국전쟁(Korean War), 베트남 전쟁(Vietnam War), (페르시안)걸프 전쟁(Persian Gulf War). ▶문:세계 1차대전 기간 중 대통령은 누구였는가?(Who was President during World War I ?) 답:28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다. 1913년부터 1921년까지 재임했다. ▶문:대공항과 2차대전 기간 중 대통령은 누구였나?(Who was President during the Great Depression and World ar II?) 답: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다. 미국 유일의 4선 대통령으로 1933년 임기를 시작, 1945년 4월 독일 항복을 목전에 두고 사망했다. ▶문:세계 2차대전에서 미국은 누구와 싸웠는가?(Who did the United States fight in World War II ?) 답:1940년 삼국동맹을 맺은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세 나라 일본(Japan), 독일(Germany), 이탈리아(Italy)와 싸웠다.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 일본은 쇼와(昭和) 천황 히로히토가 이끌었다. ▶문:대통령이 되기 전 아이젠하워는 장군이었다. 어느 전쟁에 참전했는가?(Before he was President, Eisenhower was a general. What war was he in?) 답:세계 2차 대전(World War II)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1953년부터 1961년까지 34대 대통령을 지냈다. 이종호 논설실장

2018-10-20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6] 흑과 백·남과 북…아물지 않는 미국의 상처

#. 남북 분열 남북전쟁(Civil War)은 미국의 가장 큰 상처다. 원인은 복잡다단했다. 가장 단순한 설명은 독립 직후부터 남과 북은 사실상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부터 달랐다. 남부 여러 주들은 계속해서 자치권을 가진 주로 남아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국 정치는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해지는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남부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배경도 판이했다. 북부는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남부는 기존 농업 경제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담배나 목화를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에서 흑인노예의 노동력은 필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노예제도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정치권 최대 현안이 됐다. 19세기 초 미국은 노예를 인정하는 노예주와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가 11대 11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서부 개척 및 영토 확장으로 새로운 주들이 연방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자 남과 북은 의회 주도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까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1819년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 신청을 하면서 현실이 됐다. 남과 북은 격렬한 논쟁 끝에 절충안을 택했다. 미주리주는 노예주로 가입하되 마침 매사추세츠에서 분리한 메인주를 자유주로 연방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앞으로 새로 연방에 가입하는 주는 북위 36도 30분을 경계로 그 이남은 노예주, 그 이북은 자유주로 하기로 했다. 유명한 1820년 미주리 협정이다. 1849년 캘리포니아가 연방에 가입하면서 상황은 또 달라졌다. 연방의회는 격론 끝에 노예제 허용 여부는 주민 의사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미 노예제는 반시대적이었다. 1850년, 불리해진 남부를 달래기 위한 도망노예환송법(Fugitive Slave Act)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다른 주로 도망간 노예는 체포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도망 노예를 도운 사람까지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대립에 기름을 끼얹었다. 남부에서 태어난 흑인 노예 드레드 스콧(1795~1858)은 주인을 따라 북부로 이사해 자유의 몸이 됐다가 주인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북부에 사는 동안 노예 신분은 무효가 됐기 때문에 남부에서도 노예가 아님을 인정해 달라고 소송을 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미주리협정은 백인들의 사유재산권(=노예)을 침해하고 있으므로 위헌"이라며 스콧은 자유인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여태까지의 노예제 반대 운동이나 반대 법안을 일거에 무효로 만들었다. 남부는 환호했고 북부는 분노했다. (이 판결은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 가치를 노예제도 유지 목적에 끌어다 썼다는 점에서 미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기록되었다.) 그 무렵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링컨은 이미 2년 전 행한 연설에서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다'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1860년 선거에서 링컨은 남부 9개주에선 단 한 표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을 확보해 16대 대통령이 됐다. 남부는 링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제일 먼저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탈퇴했다. 이어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뒤를 따랐다. 이들은 독자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를 대통령으로 세웠다. 미합중국은 건국 84년 만에 두 나라로 완전히 쪼개졌다. 다시 연방을 세우는 길은 전쟁밖에 없었다. #.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1861년 4월 12일, 첫 포성이 울렸다. 남부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 내 연방군 요새 섬터(Fort Sumter)를 포격했다. 이후 4년간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전쟁은 참혹했다. 나라는 피로 넘쳤다. 1862년 9월 7일. 밀리던 북군이 메릴랜드 앤티탬 전투에서 승리했다. 닷새 뒤 링컨은 역사적인 노예해방(Emancipation Proclamation)을 선언했다. 1863년 1월 1일부터 미국내 모든 주의 노예를 해방한다는 내용이었다. 파장은 엄청났다. 남부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도망쳐 북군에 가담했다. 남군을 지원할 수도 있었을 영국과 프랑스의 마음도 돌려놓았다. 전세는 북군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1863년 7월 2일, 게티스버그 전투는 전쟁의 분수령이었다. 남군 7만 5천, 북군 10만 명이 대치했다. 3일간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남군은 퇴각했다. 양측 합쳐 5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그곳에 전몰자 묘지와 충혼탑이 건립됐다. 헌납식에서 링컨 대통령이 연설했다. "이들 전사자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그것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었다. 1865년 4월 3일,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몬드가 함락됐다.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전쟁은 끝났다. 북군 36만명, 남군 2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북을 합친 전사자 62만명은 미국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로 기록됐다. 1차대전 때 미군 전사자는 11만5000명, 2차대전 때는 31만 8000명이었다. 후유증은 더 컸다. 남과 북의 골은 오히려 깊어졌다. 흑백의 인종적 증오심은 더 강해졌다. 18만 명이나 되는 흑인이 북군에 합류해 '노예해방'을 위해 싸웠지만 그들이 진정한 '미국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오랜 시간'을 더 견뎌야 했다. 1865년 1월, 남북전쟁 끝무렵 연방의회는 노예제도를 전면금지하는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의 노예제도는 공식 소멸됐다. 하지만 법은 법, 현실은 현실이었다. 흑인들에겐 자유가 주어졌지만 농사지을 땅도, 그들을 지켜줄 법 질서도, 보장받을 권리도 아직은 없었다. 차별은 더 교묘해졌고 노골화됐다. 흑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KKK단(Ku Klux Klan)도 준동했다. 시작은 전쟁 직후 테네시주에서였다. 전직 사령관, 남부연합 지도자, 교회 목사 등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리에 관심보이는 흑인이나, 그들을 돕는 백인들을 강제로 끌어다 집단 구타하고 심할 경우 올가미에 달아 처형했다. #. 머나먼 화해의 길 증오와 원한의 상처는 길고 깊었다. 그 때문인지 남부엔 링컨 기념상이 드물다. 대신 지금도 남부 곳곳엔 로버트 리 장군 동상이 서 있다. 많은 남부인들은 그를 북부 침략군에 맞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운 영웅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악랄했던 노예제의 상징으로 리 장군의 동상을 바라본다. 1960년대 민권운동 이후 지금까지 백인우월주의를 경계하는 많은 사람들이 리 장군 동상 철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유다. 링컨은 '노예해방' 그 하나만으로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정작 링컨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노예해방이 아니라 연방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흑인 노예 400만명을 해방시키기 위해 젊은 군인 62만 명이나 희생시킨 그의 선택이 최선이었느냐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노예해방, 미 합중국 수호라는 링컨의 공적을 의심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1865년 링컨이 다시 대통령이 됐다. 전쟁으로 깊어진 감정의 골을 메우고 황폐화된 남부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가 재선 대통령의 과제였다. 링컨은 화해와 용서로 다시 하나가 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4월 14일, 링컨은 극렬 남부주의자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부가 항복한지 불과 닷새 뒤였다. 암살자의 이름은 존 부스(John Booth)였다. 주요 연표 -1619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최초의 흑인 노예 들어옴 -1808년 노예수입금지법 통과 -1820년 미주리협정(북위 36도 30분을 경계로 이남은 노예제 허용, 이북은 불허) -1831년 버지니아 노예 네트 터너 폭동 -1832년 노예반대협회 조직 -1850년 도망노예환송법 제정 -1854년 미주리 협정 폐지. -1857년 연방대법원 드래드 스콧 판결 -1859년 노예제 반대론자 존 브라운 반란 (버지니아 하퍼스페리 연방 무기고 공격) -1860년 링컨 16대 대통령 당선 -1861년 남부 11개주 연방 탈퇴, 남부연합 결성, 남북전쟁 발발(~1865) -1862년 링컨 대통령 노예해방 발표 -1863년 노예해방령 공식 발효 -1863년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 -1865년 노예금지 규정한 수정헌법 13조 통과, 링컨 두 번째 임기 시작, 남부연합 항복, 링컨 대통령 피격 사망 ---------------------------------------------------------------------------------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어떤 사람들이 미국에 노예로 팔려 왔나? (What group of people was taken to America and sold as slaves?) 답:아프리카인(Africans/people from Africa) ▶문:미국 남부와 북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무엇이라 하는가? (Name the U.S. war between the North and the South.) 답:The Civil War(남북전쟁) / 주들 간의 전쟁(the War between the States) ▶문:남북전쟁이 발발된 원인 하나만 말해 보라. (Name one problem that led to the Civil War.) 답:노예제도(Slavery) / 경제적인 이유(economic reasons) / 주 정부의 권한(states' rights) ▶문:에이브러햄 링컨의 중요 업적 중 하나는? (What was one important thing that Abraham Lincoln did?) 답:노예 해방(Freed the slaves) / 노예 해방 선언 (Emancipation Proclamation) / 연방 보존 혹은 수호 (saved or preserved the Union) / 남북전쟁 중 미합중국을 이끎(led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Civil War) ▶문:노예해방선언이 한 일은 무엇인가? (What di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do?) 답:노예를 해방함(Freed the slaves) / 남부연합 주들의 노예를 해방함(freed slaves in the Confederacy / freed slaves in the Confederate states / freed slaves in most Southern states) 이종호 논설실장

2018-09-30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5] 땅이 국력…열심히 사고, 얻고, 빼앗았다

미국은 대국이다. 군사력, 경제력이 커서 대국이고 땅이 커서 또한 대국이다.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는 러시아다. 2위는 캐나다, 그 다음이 미국이다. 하지만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 대부분인 러시아 캐나다와 달리 미국은 모두가 알짜배기 땅이다. 처음부터 그 넓은 땅, 그 좋은 땅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1776년 독립선언을 할 때는 대서양 연안 13개주에 불과했다. 1783년 독립전쟁 승리 후엔 오대호에서 애팔래치아 산맥 넘어 미시시피강까지 영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이후 미국은 사고, 뺏고, 얻으면서 불과 60여년 만에 건국 당시의 3배가 넘는 땅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 이면엔 빼앗기거나 잃은 자의 눈물과 울분, 후회와 회한이 있었다. 아메리칸 인디언,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 등이 그들이다. 요즘 각국은 손바닥만한 작은 땅 뙈기를 놓고도 눈에 불을 켠다. 툭하면 벌어지는 영토분쟁이 그것이다. 초창기 미국은 그 많은 땅을 그저 줍다시피 했다. 전쟁으로 빼앗기도 했고 돈을 주고 사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 미국을 축복받은 나라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국은 그 넓은 땅을 갖게 되었을까. 간단하게나마 과정을 더듬어 본다. #. 루이지애나 매입 역사는 겹친 우연으로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얻게 된 것도 그랬다. 당시 프랑스 지배자 나폴레옹은 신대륙 루이지애나에 또 하나의 제국을 건설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리브해 연안의 자국 식민지 산토도밍고(지금의 아이티)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유럽 원정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던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맞수 영국은 호시탐탐 그 땅을 노렸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미국에 선심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그것도 모르고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기반으로 미국을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미국은 프랑스를 달래고, 당시 교역의 중심이던 뉴올리언스 일대를 매입하려는 의도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 대표는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1831)였다. 훗날 5대 대통령이 되어 중남미를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시킨 '먼로 독트린'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먼로는 먼저 프랑스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아예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먼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절단은 나폴레옹의 마음이 바뀔까 노심초사하며 서둘러 협상을 했다. 1803년 정식 매매계약이 체결됐다. 가격은 단돈 1500만 달러. 에이커당 2.8센트밖에 안 되는 헐값이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한 달 반 뒤에야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다. 제퍼슨은 영토 변경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였지만 굴러들어온 떡이 행여 잘못될까봐 의회의 비준 절차도 생략하고 매매계약서 승인부터 했다. 물론 의회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미국은 하루 아침에 두 배나 영토가 늘었다. 막대한 국가적 부의 원천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강대국 도약의 기반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훗날 역사가들은 루이지애나 매입을 미국사에서 헌법 제정 다음으로 중요하게 꼽기도 한다. #. 1812년 영국과의 전쟁 1800년대 미국은 안으로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신과 존재감을 높여가던 시기였다. 전쟁은 내부 갈등 봉합과 애국심 고양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미국은 1861년 남북전쟁 말고도 외국과 3번의 큰 전쟁을 치렀다. 운도 따랐다. 결과적으로 내부 단합은 강화됐고 영토 또한 더욱 넓혀갈 수 있었다. 첫째는 영국 상대의 1812년 전쟁(War of 1812)이다. 그 무렵 영국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교전 중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 상선 선원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그것 말고도 미국 땅에서 여전히 종주국 행세를 했다. 당시 제4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26) 대통령은 이를 주권 침해로 간주하고 대영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아직도 국가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미국으로선 다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것이 커다란 모험이자 시련이었다. 워싱턴 정가에선 각 주의 권한 강화를 주장하는 반연방파 때문에 대통령의 입지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은 총력으로 미국을 압박했다. 수도 워싱턴이 쑥대밭이 되고 국회의사당과 백악관도 불탔다. 미국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의미있는 승전고도 울렸다. 전쟁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협상이 시작되고 양국은 전쟁 전 상태로 원상복귀하기로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도 영국도 별 소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아니었다. 사실상 '제2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전국에 퍼져갔다. 민족주의, 애국주의도 크게 고양됐다. 전쟁을 수행한 대통령 매디슨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맨해튼의 매디슨 스퀘어가든 같은 지명은 그의 이름을 기린 것이다. 영국과의 전쟁은 'The Star Spangled Banner'라는 미국 국가(國歌)도 유산으로 남겼다. 1814년, 메릴랜드의 맥헨리(McHenry) 요새는 영국군의 공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그런데 폐허의 포연 속에서도 미국 국기 하나가 아침 햇살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연히 그 광경을 본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라는 사람이 급히 수첩을 꺼내 시 한 편을 적어 내려갔다. Oh!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로 시작하는 시였다. 지금 미국인들이 행사나 이벤트 때마다 부르는 국가의 가사다. #. 탐험과 개척의 시대 루이지애나가 미국 땅으로 편입되고 영국과의 전쟁도 이겨내자 서부개척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 됐다. 동시에 진취적 기상의 프런티어 정신은 미국의 정신이자 미국인이면 누구나 흠모하는 숭고한 가치가 됐다. 신호탄은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1774~1809)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1770~1838)가 이끄는 원정대였다.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제퍼슨 대통령은 일찍부터 미국의 미래상을 서부와 연관지어 생각하며 이들이 떠나기 전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등을 직접 가르치기까지 하며 탐험 성공을 독려했다. 1804년 5월, 40명의 대원들은 미주리강을 거슬러 오르며 서쪽으로 출발했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마침내 태평양까지 닿았다. 그리고 1806년 9월, 2년 4개월에 걸쳐 8000마일에 달하는 대장정을 끝내고 탐험대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너머 알려지지 않았던 서부 세계에 대한 지형과 지도, 기후와 생태, 인디언 부족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가져왔다. 300여종의 새로운 동식물과 50여 인디언 부족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탐험대가 가져온 정보와 지식은 서부 개척 물결에 박차를 가했다. 뿐만 아니라 훗날 미국이 로키 산맥 너머 오리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가 됐다. 서부는 기회의 땅이었다. 동부의 미국인들은 낯설고 황량한, 그렇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서부로, 서부로 나아갔다. 모르몬교도와 유럽 각국에서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 골드러시를 좇아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나선 사람들 각양각색이었다. 정부도 적극 지원했다. 약간의 돈만 내면 농장을 꾸릴 만한 훌륭한 땅을 충분히 구입할 수 있었다. 원하면 무료로 주기도 했다. 미국의 주도 순식간에 늘어났다. 일정수의 인구만 확보되면 어떤 지역이든 새로운 주로 승격시켜 연방에 편입시켰다. #. 캘리포니아 병합 19세기 초만 해도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텍사스 등 서남부 대부분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땅에 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1820년대 이미 텍사스의 미국인은 2만을 넘고 있었다. 멕시코의 지배력은 먹히질 않았다.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1836년 멕시코 토벌대가 왔다. 텍사스 민병대는 알라모(Alamo)에서 맞서 싸웠지만 187명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텍사스인들은 "알라모를 잊지말자"며 더 맹렬히 싸웠다. 결국 샘 휴스턴 장군이 이끄는 민병대가 샌 하신토 전투에서 멕시코 군대를 물리쳤다. 텍사스는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1836~1845)이 되었다. 텍사스 주민들은 독립 국가보다는 미국 연방이 되기를 더 원했다. 1845년, 텍사스는 28번째 주로 미국 연방이 됐다. 미국의 다음 목표는 캘리포니아였다. 1846년,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 유역의 작은 충돌을 빌미로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했다. 멕시코-미국전쟁(Mexican-American War)이 시작됐다. 미국은 개전과 동시에 눈독 들여왔던 캘리포니아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어 뉴멕시코 주도 샌타페를 점령하고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해갔다. 다급해진 멕시코는 평화협상을 요청했다. 사실상 항복이었다. 결국 1848년 과달루페이달고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리오그란데강 이북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는 미국 땅이 됐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다. 미국은 멕시코에게 전쟁 배상금 형식으로 1500만 달러를 지급했다. 멕시코가 미국에 진 빚 325만 달러도 탕감해주었다. 캘리포니아 병합은 형식상 매입이었지만 명백한 침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멕시코로선 땅을 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힘이 없었다. 그후로도 쭉 힘이 부쳤다. 자유의 땅이라지만 여전히 피해갈 수 없는 약육강식의 역사였다. 영토 확장 주요 연표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1500만 달러) ▶1818년: 영국과 캐나다 인접 국경 조정 ▶1819년: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포함해 현재의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콜로라도, 앨라배마주 일부 매입 (500만 달러) ▶1845년: 텍사스공화국 합병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Oregon Treaty). 영국에게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넘겨주는 대신 아이다호, 오리건, 워싱턴주 전 지역과 와이오밍과 몬태나 일부지역을 미국 영토로 확정. ▶1848년: 멕시코 전쟁 승리 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 와이오밍 등을 넘겨받음.(1825만달러) ▶1853년: 남부 대륙횡단 철도 건설을 위해 리오그란데 부근 멕시코 땅 개즈던 지역 매입.(1000만 달러)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720만 달러) ▶1898년: 하와이 왕국 병합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 넘겨받음. --------------------------------------------------------------------------------- 시민권 시험 예상 문제 풀이 ▶문:미국이 1803년 프랑스로부터 매입한 영토는 어디인가?(What territory did the United States buy from France in 1803?) 답:루이지애나 지역(the Louisiana Territory) 또는 루이지애나(Louisiana)라고 대답하면 된다. 당시 루이지애나는 지금의 루이지애나주와는 달리 현재 미국 중부 전체를 가리킨다. 아래 지도 참조 ▶문:1800년대에 미국이 치른 전쟁 중 한 가지만 말해 보라. (Name one war fought by the United States in the 1800s.) 답:1812년 영국과의 전쟁(War of 1812),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Mexican-American War), 1861년 남북전쟁(Civil War),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Spanish-American War) 중 하나를 말하면 된다. 이종호 논설실장

2018-09-09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3] '건국신화' 만들어 간 영웅들의 시대

#. 미국의 가장 큰 국가 기념일은 7월 4일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이다. 1776년 식민지 13개주가 대영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하지만 이 날은 독립을 이룬 날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배에 처음으로 공식 반기를 든 날이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과 힘든 전쟁을 치르며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했다. 1783년 파리조약에서 국제적으로 독립 승인을 받고, 1787년 헌법을 제정해 미국이라는 국가를 정식 출범시키기까지는 10여년이 더 필요했다. 세계 최강 영국에 맞서다 그렇다면 멀쩡히(?) 잘 있던 북미 식민지 13개주는 왜 전쟁까지 불사하며 독립을 쟁취하려 했을까. 교과서의 모범 답안은 '자유'를 갈망해서다. 시민권 시험 문제풀이집이 일러주는 답은 좀 더 구체적이다. 높은 세금 때문에, 대표 없는 과세 때문에, 식민지 주둔 영국군의 횡포 때문에 등. '그럭저럭 하지만 충분히' 먹고 살만했던 식민지가 '돌변한' 영국의 태도에 위협을 느꼈다는 말이다. 당시 북미 13개주는 영국의 식민지라고는 해도 우리 관념 속에 있는 일제 식민지같은 곳은 아니었다. 식민지인들은 나름 많은 자치와 자유를 누렸고 오히려 영국이라는 보호막 아래 많은 '공짜 이익'도 누렸다. 하지만 영국은 북미에서, 또 유럽에서 계속 전쟁을 치렀고 재정압박에 내몰렸다. 탈출구는 북미대륙 신흥 식민지였다.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잇따라 만들며 식민지인들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설탕법, 군대숙영법, 인지법, 타운센드법 등이다. 당연히 반발이 일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구호를 외치며 조세 관련 법 철폐 운동이 벌어졌다. 영국 상품 불매운동도 일어났다. 영국도 그냥 있지 않았다. 충돌은 당연했고 공공연히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터져 나왔다. 저항의 근원지는 보스턴이었다. 1770년 보스턴 주둔 영국군과 주민들간의 사소한 충돌로 식민지 주민 5명이 사망했다. 식민지 사람들은 이를 '대학살'이라는 크게 과장된 이름을 붙였다. 반영감정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희생자 장례식엔 당시 보스턴 주민 1만 6천 명 중 1만 명이 참가했다. 3년 후 1773년엔 보스턴 차(茶) 사건이 터졌다. 식민지 사람들이 차에 부과되는 세금에 반대하며 보스턴항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 회사 선박에 잠입, 선적돼 있던 수백 박스의 차를 바다 속으로 던져버린 사건이다. 영국의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보스턴항을 폐쇄했고 찻값 보상을 요구했으며 자치권도 철회했다. 4천명의 병력과 함께 새 영국 총독이 부임했다. 이들의 식량과 숙영지 비용도 식민지가 부담해야 했다. 식민지인들을 분노했다. 매사추세츠뿐 아니라 다른 식민지들까지 가세했다.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 56명이 참가했다. 영국의 강압적 법령에 반대하는 결의안이 채택됐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2차 회의를 소집한다는데도 합의했다. 이제 독립은 시대적 소명이 됐다. 이른바 '애국자'들은 연설로 혹은 책으로 대중을 각성시켰다. 페트릭 헨리(1735~1799)는 1775년 버지니아 의회 연설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절규했다. 이 말은 이제 미국인이라면 유치원생도 아는 명언이 됐다. 토머스 페인(1737~1809)은 1776년 처음 발간된 '상식(The Commonsense)'이란 책에서 꿈과 자유의 신대륙이 폭군이 지배하는 작은 섬나라로부터 독립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 주장했다. 책은 50만부 이상 팔렸다. 당시 식민지 인구는 노예를 포함해 300만명 정도였다. 성인 백인 남자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을 읽었다는 얘기다. 1776년 7월 4일 채택된 독립선언서는 그 절정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는 식민지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인간의 천부 인권과 자유, 행복 추구권을 담아냄으로써 세계사적인 문건이 되었다. 미국 독립의 영향과 의미 #. 독립을 향한 첫 총성은 이미 울렸다. 1775년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에서였다. 식민지군 8명이 영국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다시 필라델피아에 모여 2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영국과의 전쟁을 공식 결의하고 식민지 연합군인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창설했다. 총사령관은 조지 워싱턴이었다. 전쟁은 1775년부터 8년간 이어졌다. 전투는 지지부진했고 대륙군은 고전했다. 조지 워싱턴은 지구전으로 버텼다. 시간은 식민지 편이었다. 몇 차례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 스페인도 식민지 편에 섰다. 마침내 대륙군은 1781년 버지니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 주력부대의 항복을 받았다. 영국은 의회도 국왕도 더 이상의 전쟁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1783년 파리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유럽 각국이 식민지 미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영국은 기존 13개주 외에 미시시피강까지 이르는 넓은 땅까지 내어 놓았다. 참전한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포함해 북미 남서부를 넘어 캘리포니아 연안까지 이르는 광대한 땅을 챙겼다. 8년의 독립전쟁 기간 동안 2만 5000명의 식민지군이 죽었다. 영국군도 2만여 명이 전사했다. 독립전쟁은 북미 대륙에서 벌어졌지만 여러 유럽 국가들이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프랑스 군인들은 귀국해 왕도 없고 신분도 계급도 없는 새 나라 미국 이야기를 전했다. 그들이 전한 자유와 평등에의 꿈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독립전쟁을 읽으며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어떻게 세계 최강 영국으로부터 미국이 독립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은 대답한다. 영국의 어설픈 식민지 경영과 식민지인들의 경제적 욕망,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합쳐진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이는 시민권 시험이 요구하는 '자유'라는 답변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독립 전쟁 승리는 단순히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상의 '위대한 사건'이었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독립전쟁보다는 '미국혁명'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신생 미국이 어떻게 '혁명'을 완성해 가는지는 다음 회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영웅과 배신자 #.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 미국 독립 전쟁의 최고 영웅은 조지 워싱턴(1732~1789)이다. 버지니아의 농장주였던 그는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어 별다른 전투경험이 없는 오합지졸들로 영국군에 맞섰다. 그럼에도 탁월한 지도력으로 7년을 버티다 마침내 난공불락의 요크타운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미국 독립 후 첫 대통령이 되었고 건국의 아버지로 모든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은 가장 미국인다운 미국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다재다능한 천재였던 그는 정치인, 외교관, 작가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피뢰침을 발명한 과학자이기도 했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세운 교육가이기도 했다. 미국 최초로 무료 도서관을 세웠고 소방서도 만들었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루이 16세를 설득,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미국 독립운동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토머스 제퍼슨(1743~1826)도 독립선언서 기초로 영원한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철학과 과학, 문학에 두루 정통했고 7개 국어를 구사했다. 나중에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됐지만 자신의 묘비명엔 대통령 경력은 안 쓰고 독립선언서 기초한 것은 남겼을 정도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독립선언서 서명은 잘못될 경우 목숨까지 걸어야 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대륙회의 의장이던 존 행콕은 눈이 나쁜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안경을 쓰지 않고서도 자신의 이름을 잘 볼 수 있도록 가장 큰 글씨로 서명했다. 미국인들은 이런 애국자들을 제대로 기리고 기억한다.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 존 행콕 등 전국 곳곳의 도로, 공원, 빌딩 등에 독립전쟁 '영웅'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그래서다. 반면 미국에도 이완용 같은 매국노가 있었다. 뉴욕주 새러토가에 가면 특이한 장화 동상을 볼 수 있다.(왼쪽 아래사진) 독립 전쟁 초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베네딕트 아놀드(1741~1801)의 장화 동상이다. 그는 나중에 변절해 영국군과 내통하고 영국군 장군이 되어 식민지군을 괴롭힌 희대의 배신자가 됐다. 지금 미국인들은 그 장화 동상을 보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변절자를 기억한다. 심지어 '에그 베네딕트'라는 요리를 만들어 씹어먹으며 그를 조롱하기도 한다. 시민권 시험 문제 풀이 ▶문:식민지 사람들은 왜 영국에 맞서 싸웠는가? (Why did the colonists fight the British? ) 답: 높은 세금 때문에 (because of high taxes) / 대표 없는 과세 때문에(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 영국 군대가 제멋대로 숙영했기 때문에(because the British army stayed in their houses (boarding, quartering) / 자치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because they didn't have self-government) ▶문:독립선언서는 누가 썼는가? (Who wrote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답.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문:독립선언서가 채택된 것은 언제인가? (When was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dopted? 답. 1776년 7월 4일 (July 4, 1776) ▶문:벤저민 프랭클린은 무엇으로 유명한가? 하나만 말해보라. (What is one thing Benjamin Franklin is famous for?) 답. 미국 외교관(US diplomat) / 최고령 헌법제정 위원(oldest member of the Constitutional Convention) / 최초의 우정국 장관(first Postmaster General of the United States) /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저자(writer of "Poor Richard's Almanac) / 최초의 무료도서관 설립 (started the first free libraries) ▶문:미국의 국부(國父)는 누구인가? (Who is the 'Father of Our Country'?) 답.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이종호 / 논설실장

2018-07-29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2] '메이플라워'보다 13년 먼저 온 세 척의 배

#. 17세기 유럽의 민생은 처절했다. 전쟁과 굶주림, 전염병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1618~1648년 신, 구교도가 싸운 30년 전쟁 기간 동안 400여만 명이 페스트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절망적 상황의 유럽인에게 신대륙은 한 줄기 빛이었다. 기회만 되면 너도나도 대서양을 건넜다. 신앙의 자유, 정치적 자유, 신분과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찾아서였다. 그러나 가장 큰 목적은 배고픔으로부터의 탈출, 곧 돈벌이였다. 하지만 초기 이주자들이 겪은 악전고투를 생각하면 신대륙이 꿈의 낙원만은 아니었다. 목숨 건 뱃길, 척박한 기후와 풍토병, 부족한 식량, 사나운 원주민 등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첫 정착촌 제임스타운 1620년, 유럽을 떠나 180톤 크기의 화물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102명의 영국인들이 지금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원래는 버지니아로 갈 계획이었지만 풍랑을 만나 1000km나 북쪽 해안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은 영국 교회의 박해를 피해 식민지회사로부터 버지니아 지역 토지 권리증을 사서 목숨 건 대서양 횡단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항해 중 미지의 세계에 더 잘 정착하기 위한 규약을 스스로 정하고 서명했다. 유명한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이들이 바로 미국이 항상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최초의 미국인'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들이다. 하지만 실제 식민지 미국 역사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1585년, 월터 롤리 경은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을 답사하고 로어노크(Roanoke)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정착민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첫 식민지가 될 뻔한 로어노크는 홀연히 사라졌다. 다만 월터 롤리 경이 붙인 '버지니아'라는 이름은 살아남았다. 버지니아는 처녀였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의 별명 버진 퀸(Virgin Queen)에서 따온 이름이다. 당시 버지니아는 지금의 버지나아와 달리 북미 대륙 동남부 평야지대를 통틀어 일컫는 지명이었다. 반면 북부 산악지대는 뉴잉글랜드로 불렸다. 1607년, 104명의 영국인들이 다시 건너왔다. 갓 스피드, 수잔 콘스턴트, 디스커버리라는 세 척의 배에 나눠 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버지니아 체사피크만이었다.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보다 13년이나 먼저였다. 그들은 그곳을 영국 국왕 제임스 1세(재위 1603~1625)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이라 명명했다. 그들 역시 첫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반 이상이 죽었다. 하지만 반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최초의 신대륙 정착지를 탄생시켰다. 제임스타운의 기틀을 닦은 사람은 선장 존 스미스(1580~1631)였다. 인디언에게 붙잡혀 죽을 뻔 했지만 추장 딸 포카혼타스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존 스미스는 훗날 신대륙에서 자신이 보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7권의 책으로 남겼다. 불과 1년 남짓밖에 지사 노릇을 안 했지만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의 주역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다. 제임스타운의 또 다른 주인공은 존 롤프(1685~1622)였다. 포카혼타스의 남편이기도 했던 그는 1612년 버지니아 토착 담배에 좀 더 순한 자메이카 종자를 교배시킨 새로운 담배 재배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영국으로 내다 팔았다. 런던 사람들은 곧 담배 없이는 못 살 지경이 되었고 제임스타운은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제 버지니아는 담배 농사의 본거지가 되었다. 미국 역사의 어두운 한 그림자가 여기서부터 드리워졌다. 담배 농사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불러들인 계기가 된 것이다. 100년 넘게 걸린 개척사 #. 미국은 50개 주로 되어 있다. 주는 영어로 스테이트(State), 즉 국가라는 뜻이다. 미국은 최초 13개 스테이트가 함께 세운 합중국(合衆國,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1776년 독립 이전까지 13개 주는 모두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인보다 먼저 북미 대륙에 도착한 유럽인들도 많았다. 16세기에 시작된 식민지 확보 경쟁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사람들이 먼저 신대륙을 휘젓고 다녔다. 1588년 영국함대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은 뒤늦게 신대륙 개척에 나섰다. 첫 시작은 버지니아 쪽이었다. 1607년 최초 버지니아 식민지부터 1732년 마지막 조지아까지 13개 식민지가 설립되는 데는 100년이 넘게 걸렸다(지도 참조). 13개 식민지는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적으로도 많이 달랐다. 뉴잉글랜드라 불리는 북부 식민지는 영국계 청교도가 중심이었다.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풍부한 목재를 이용한 임업과 어업, 조선업 등이 발달했다. 중부 식민지는 밀을 중심으로 한 농산물 재배가 활발했고 무역과 상업이 크게 발전했다. 종교적으로 관대했기에 퀘이커, 가톨릭, 루터교 신자는 물론 유대인들까지 다양하게 몰려들었다. 뉴욕은 원래 1620년대 네덜란드인이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개척한 식민지였다. 하지만 1660년대 들어 영국이 강제로 빼앗았다. 당시 국왕 찰스 2세(재위 1660~1685)는 동생 요크 공작에게 이곳을 주면서 이름까지 뉴욕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네덜란드인을 비롯해 벨기에, 프랑스, 독일, 스칸디나비아인 등 다양한 유럽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뉴욕이 지금까지도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로 번영하게 된 토대가 그때 이미 형성된 것이다. 남부 식민지는 체사피크만을 낀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그리고 그 남쪽 사우스-노스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를 말한다. 비옥한 토질을 바탕으로 플랜테이션 형태의 대규모 농장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었다. 과장된 청교도 정신 #. 미국은 역사가 짧다. 보완할 건국 신화가 필요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영웅들의 이야기, 용감한 서부 개척자들의 이야기가 모두 건국 신화가 됐다. 숭고한 청교도 정신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기독교 신앙인들의 의지와 관용은 지금도 미국을 지탱하는 최고의 미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만큼 늘 미화되고 과장되는 면이 있다. 영국 국교로부터 박해를 피해온 청교도들이었지만 신대륙에서 자신들이 되자 그들 역시 다른 종파를 허락지 않으려 했다. 가톨릭 신자나 퀘이커 교도, 위그노 등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매사추세츠가 아닌 타 지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신분제의 구습도 여전했다. 1700년 무렵 식민지 정착민은 약 25만명이었다. 1775년 미국 독립 직전에는 250만명으로 10배나 증가했다. 빈부 차이도 점점 커졌다. 신대륙 식민지는 엄연히 대영제국의 일부였다. 부자들은 다시 유럽 귀족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 대도시의 특권 계급층은 자신을 완전히 영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유럽풍의 대저택을 짓고 호화 파티를 열며 노예를 부리고 영국 귀족처럼 행세했다. 제임스타운은 버지니아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가 되면서 자유 기업 정신, 법치주의, 민주 정부 등 미국식 제도와 관습의 대부분이 창안되고 실천되었다. 하지만 미국 역사에서 제임스타운은 늘 플리머스에 밀렸다. 몇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인들이 남군의 본거지였던 버지니아의 역사적 비중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플리머스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자랑스러운' 추수감사절 전통을 만들었고 그 후손들이 하버드, 예일 등 명문 대학을 설립해 미국 교육의 방향을 처음부터 그렇게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지난 2007년은 제임스타운 정착촌 건립 4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 등 유명인사들의 방문도 잇따랐다. 미국 역사 출발지로서의 위상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도 높았다. 그로부터 10년, 관광객은 늘었지만 사람들 인식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한 번 틀어진 역사는 바로 세우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논설실장 시민권 시험 문제 풀이 ▶문:초창기 식민지 개척자들이 미국에 온 이유 중 한 가지는 무엇인가?(What is one reason colonists came to America?) 답:모범답안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이중 하나를 말하면 된다. ①자유(freedom) ②정치적 자유(political liberty) ③종교적 자유(religious freedom) ④경제적 기회(economic opportunity) ⑤종교 생활(practice their religion) ⑥박해를 피해서(escape persecution) ▶문:처음에는 13개 주가 있었다. 그 중 3개만 말해 보라. (There were 13 original states. Name Three.) 답:미 동부 연안에 있던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독립전쟁 승리 후 신생 독립 미국의 최초 13개 주가 되었다. 북쪽에서부터 순서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뉴햄프셔(New Hampshire)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델라웨어(Delaware)▶메릴랜드(Maryland) ▶버지니아(Virgi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조지아(Georgia)

2018-07-08

[이종호의 시민권 미국 역사-1] 배신·약탈·살육으로 얼룩진 500년 원죄

인디언에 대한 만행의 과거사 2010년에야 정부가 공식 사과 한인 이민자는 두 개의 조국을 가진 사람이다. 마음엔 언제나 떠나 온 한국을 품고 있을 지라도 현실에선 미국도 보듬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이 땅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이민국이 발간한 '미국 시민권 시험 예상 문제집'에도 100개 중 29개가 역사 문제다. 거기에 정부 조직, 정치 제도 등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되는 문항까지 더하면 거의 반이 역사 관련 문제다. 미국 시민권 시험은 사실상 미국 역사 시험인 셈이다. 시민권 시험 문제집에 실린 역사 문항을 중심으로 이민자라면 최소한 알아야 할 미국 역사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은 1607년 북미 대륙에서 처음 세워진 영국 이주민 정착지였다. 제임스타운설립 당시의 무용담은 미국의 탄생지 신화가 되어 모든 미국 역사책의 첫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디즈니 만화 영화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포카혼타스라는 11세 인디언 추장 딸이 존 스미스라는 백인 선장을 구출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때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포카혼타스는 17살 때 존 롤프라는 백인과 결혼해 영국으로 건너가 사회적 명사가 되었다. 훗날 레베카라는 세례명으로 개명했으며 천연두로 죽었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포와탄(Powhatan) 인디언들은 제임스타운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옥수수와 고구마 재배법을 알려주었고 숲의 풍습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제임스타운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착민들은 원주민을 배신했고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 역시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땅에 대한 소유 개념이 없던 원주민들은 땅을 소유해야겠다는 백인들의 이상한 관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모두가 나눠 써야 할 땅이었기에 농사법을 전수하고 식량을 나누어주며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맞은 첫 수확의 기쁨을 나눈 추수감사절의 감동스런 유래는 이때 생겼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이내 탐욕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624년 뉴욕으로 진출한 네델란드인들은 불과 24달러 상당의 금속 냄비와 낚시바늘, 유리구슬 등으로 인디언 추장을 꼬드겨 지금의 맨해튼을 차지했다. 신대륙에선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처음엔 원주민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지만 결국 배신과 약탈, 살육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1700년대 후반부터 100여년간 연방정부와 인디언 간에 371건이나 되는 조약이 맺어졌지만 제대로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인디언 추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백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 땅을 먹었다." 살던 곳 떠나 눈물의 강제 이주 #. 인디언 말살 정책으로 가장 악명 높았던 사람은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재임 1829~1837)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테네시 민병대 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인디언 소탕 작전으로 유명해 '날카로운 칼'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819년에는 플로리다의 세미놀족을 공격해 잿더미로 만들었다.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플로리다는 이후 미국 땅이 되었다. 잭슨은 미국 영토를 넓힌 영웅이 되었고 지금도 20달러 지폐 인물로 날마다 우리와 만나고 있다. 잭슨은 백인과 인디언은 같이 살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자 그는 의회를 압박해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1831년부터 2년간 4000여명의 촉토족이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아칸소 서부지역으로 강제 이주했다.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치카소족, 크리크족에게도 이주 명령이 내려졌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총칼 앞에선 무력했다. 마지막 강제 이주는 조지아주를 근거지로 한 체로키족이었다. 훗날 멕시코 전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될 윈필드 스콧(1786~1866) 장군이 주역을 맡았다. 그는 1938년 10월부터 이듬 해 3월까지 테네시와 켄터키를 지나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을 건너 수천마일 떨어진 오클라호마로 체로키족을 몰고(?) 갔다. 그 과정에서 추위와 피로, 굶주림으로 4000여명이 죽어 나갔다. 역사는 그 행렬을 '눈물의 행렬(Trail of Tears)'으로 기록했다. 최후의 인디언 학살은 1890년에 일어났다. 다큐 작가 디 브라운(Dee Brown)이 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1970)'는 인디언 사회에서 구전되어 오던 그들의 몰락사를 생생히 기록한 세계적 베스트셀러다. 이 책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사우스다코타주 크리크. 제7기병대가 이동 중인 원주민 라코타족을 한 곳에 모았다. 모두 350명이었다. 기병대는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다. 수색 과정에서 시비가 붙었다. 기병대의 기관총 네 정이 불을 뿜었다. 그 자리에서 153명이 숨졌다. 남은 인디언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다. 350명 가운데 거의 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890년 12월 29일, 크리스마스 나흘 뒤였다." 1924년에야 미국 시민 인정 #. 2010년 5월 20일은 미국 인디언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캔자스 출신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워싱턴 의회묘지에서 인디언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과거 폭력 행위와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공식 사과했기 때문이다. 의회묘지엔 미국 정부에 저항했던 인디언 지도자 36명이 묻혀있다. 도대체 과거 어떤 일이 있었기에 연방 정부 차원에서까지 사과를 해야 했을까. 앞서 서술한 이야기는 그 답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더 생생한 답을 구하려면 미국 독립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해 산살바도르 모래톱에 처음 닻을 내렸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상륙한 곳이 황금과 향료의 땅 인도라고 믿었고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Indian)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붉은 피부, 툭 튀어나온 광대뼈, 굵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들은 아시아로부터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와 3만 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Native American)이었다. 콜럼버스의 미 대륙 상륙은 미국 역사에선 신대륙 발견으로 미화됐지만 원주민들에겐 피로 얼룩진 수난의 시작이었다. 영웅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찬 미국의 서부 개척사가 인디언 입장에선 처절한 멸망사인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은 백인 입장에서는 모험과 용기, 인내를 의미했지만 인디언에게는 땅과 목숨을 빼앗긴 파괴와 탐욕의 저주였던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콜럼버스 도착이후 500년 동안 이리 쫓기고 저리 흩어지며 들판의 짐승처럼 피 흘리며 죽어갔다. 노예 해방과 함께 만민평등권을 부여한 1868년의 수정헌법 14조에서도 인디언은 제외됐다. 1883년 연방대법원은 인디언은 미국 땅에서 태어났어도 이방인이라고 판결했다. 콜럼버스 상륙 당시 1300만 명에 가까웠던 인디언 인구는 19세기 말 25만 명으로까지 줄었다. 미국 정부의 말살 정책 외에도 유럽인들이 들여온 전염병도 큰 원인이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은 1851년 처음 만들어졌다. 말이 보호구역이지 인디언 격리 수용을 위한 강제 주거 제한 구역이었다. 지금은 전국 326곳에 인디언보호구역이 있다. 인디언 인구는 191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생률이 사망률을 앞지르며 회복되기 시작했다. 인디언이 미국 시민으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24년부터였다. 논설실장 시민권 시험 문제 풀이 ▶문: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미국에는 누가 살았나?(Who lived in America before the Europeans arrived?) 답: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이다. 줄여서 보통은 인디언(Indian)라고 부르며 네이티브 아메리칸(Native American), 원주민(Indigenous people)으로도 부른다. 2017년 현재 아메리칸 인디언은 약 290만 명으로 전체 미국인구의 0.9%를 차지한다. 타인종 혼혈까지 합칠 경우 약 520만명으로 전체 미국 인구의 1.7%가 된다. ▶문: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 하나만 말해보라(Name one American Indian tribe in the United States). 답:연방 정부로부터 공인 받은 인디언 부족은 2017년 현재 567개에 이른다. 그 중 인구 순으로 상위 10개 부족은 다음과 같다. ①체로키(Cherokee) ②나바호(Navajo) ③수(Sioux) ④치프와(Chippewa) ⑤촉토(Choctaw) ⑥ 푸에블로(Pueblo) ⑦아파치(Apache) ⑧이로퀴이(Iroquois) ⑨럼비(Lumbee) ⑩크리크(Creek)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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